목회와진리수호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1)

무분별한 정죄, 건강신학 위해 교수들 비평 나서

김문제 | 기사입력 2018/05/06 [07:24]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1)

무분별한 정죄, 건강신학 위해 교수들 비평 나서
김문제 | 입력 : 2018/05/06 [07:24]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6317

【 <교회와신앙> 】 정이철 목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의 신학사상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제기한 연구 보고서가 나와 화제다. 연구를 진행한 교수는 총신대학교의 일곱 학자들(김성태, 이한후, 김지찬, 정승원, 김창훈, 박용규, 이상원). 한국교회와 예장합동측 총신대학교 사태에 대한 왜곡은 물론, 방언에 관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다른 사람을 무차별 정죄하는 정 목사의 발언에 대하여 깊은 책임의식을 느껴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적 성숙을 위한 성찰과 평가가 작성의 이유다. 이 평가서에 대해 독자들이 읽어 바른 판단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한 본지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에 대한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

 들어가면서

총신대 김영우 총장은 지난 십수년 동안 자신은 진정한 개혁주의자이며 총신은 잘못된 복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고 호도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바로 잡고 있다고 직간접으로 표방하여왔다.(*일곱 명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정이철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것은 정이철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고 말하며 학교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하고, 무차별적으로 근거 없이 방언을 비롯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더 이상 묵인하는 것은 신학교 교수로서 깊은 책임의식과 총신과 교단과 더 나아가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성숙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고는 서로 읽고 검토하고 보완하여 완성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 총장처럼 겉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예장합동과 총신을 변질된 현대복음주의로 흘러가는 것처럼 몰아가며 여러 학자들과 목사들을 비판하는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정이철이다.(*정이철이 담임하는 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전남 여수 인근에서 출생하여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총신대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였다. 1992년 11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신반포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전임강도사, 교육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는 서울남노회에서 강도사 인허(95.10), 목사 안수(97.10)를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님의 기쁨교회(2001-2002), 앤아버 한인장로교회 (2002-2004)에서 시무했고, 현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2004-) 담임을 맡고 있다(앤아버 반석장로교회 주소는 다음과 같다. 2118 Ann Arbor-Saline Rd., Ann Arbor, MI 48108. Tel: 734-678-7133). 그는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새물결, 2013),「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에스라서원, 2014),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GNPBOOKS, 2015) 등 세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개인적으로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정이철 목사,” 앤아버 반석장로교회 홈페이지, <http://cantoncrc.com/with_pastor>/ (2018년 4월 17일 접속); 바른믿음 홈페이지, <http://www.good-faith.net/>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이름뿐인 개혁주의를 외치는 김영우 총장을 공공연하게 두둔하며 자신도 김 총장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식의 지지 글을 자신의 사이트에 올렸다. 총신 사태를 김영우 총장의 정관변경과 사유화 그리고 학사비리 등의 문제로 보지 않고 신학적 문제로 호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양비론을 내세우며 마치 이 둘이 대립적이어서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왜곡하면서 자신을 진정한 개혁주의자라고 자처하며 자신들을 치켜세우고 있다. 말뿐인 개혁주의는 이단도 주장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거짓 선지자들과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를 구분하는 방법을 우리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마7:20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김 총장의 열매가 어떤지는 이미 많이 알려졌고 곧 확실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성경적 근거 없이 단지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교조적 착각으로 많은 목사들과 교수들을 비판하여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정이철 목사는 교만과 비방과 분열의 열매를 맺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거짓 선지자가 아닌가 진단해 본다.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특별계시의 존속을 인정하는 것으로, 심지어 이단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정이철이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신근본주의 분리주의 사고를 가지는 반개혁주의적이고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과 맞지 않은 비성경적인 이단적인 측면도 상당히 많다. 그의 신학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어거스틴, 칼빈, 핫지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이해해온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개혁주의 견해를 제시할 것이다. 그런 후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

 

I. 정이철의 신학 사상에 나타난 비 성경적 이단성
 

1.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의 방언 비판 문제

   

▲ 정이철 목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바른믿음>에서
박영돈 목사의 방언관을 비판했다.(사진은 인터넷 화면 갈무리)

정이철 목사는 소위 <바른믿음>이라는 본인의 사이트에 한국의 대표적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이며 고신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인 박영돈 교수의 방언에 관한 글들을 인용하면서 비판한다. 정이철 목사가 주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대상들은 오늘날에도 방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과 목사들이다. 비록 이들 중 누구도 방언을 성경적 특별계시 차원으로 놓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마치 이들이 특별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거나 성경이 특별계시임을 부인하는 자들인 것처럼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영돈 교수에 대한 정이철 목사의 비판이다. 그가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박영돈 교수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에 수록된 글들은 다음과 같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었겠는가?”(154쪽)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173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175쪽)


박영돈 교수는 방언에 대해 나름대로 개혁주의 틀 안에서 건전하고 날카로운 해석과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모두 외국어라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으나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일종의 기도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박영돈 교수는 이러한 개혁신학 입장에서 신학적 지식과 해석학적 지식을 갖고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철 목사는 박영돈 교수를 '이단'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심지어 그는 “박영돈 교수가 감히 이런 주장을 하고서도 편히 살기를 바랄 수 있을까? 명색이 고신의 교수이고 조직신학 학과장인 박영돈 교수가 이런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그대로 동승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다.”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해댄다. '이런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고 그대로 동승한다'는 말이 무엇인가동류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같은 이단의 범주로 그를 평가한다는 말이 아닌가개혁주의 신학자가 개혁주의 틀 안에서 자신의 방언에 대한 입장을 개진한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인신공격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자신이 이단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이다.(*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한 것도 아닌데, 박교수를 이단의 한 부류로 모는 정이철 목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단이라면 그 옷이라도 싫어해서 불구덩이에서 건져내야 하며 이것이 이웃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박영돈 교수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왜 유독 정이철 목사만 박영돈 교수를 향해 이단 이론을 답습하고 동승하고 있다고 주장할까? 여기 다른 이유는 없다. 정이철 목사 자신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른 복음이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꾸짖을 때 사용했던 말이다(갈1:6-9). 여기 다른 복음이란 한 마디로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게 되지만 율법의 행위, 곧 할례를 받고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론을 떠나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것 외에 의롭게 만드는 다른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박영돈 교수가 칭의론을 거부했는가? 그가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했는가? 박영돈 교수가 방언을 계시의 방편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기도의 수단으로써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인데, 정이철은 박영돈 교수를 허접한 이단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자라고 정죄하였다. 정이철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자신을 의롭다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유대주의자이며 바리새인이다. 요한 칼빈의 멘토요, 종교개혁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어거스틴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상기해야 한다.
 

2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와 직통설교라는 정이철의 주장은 개혁신학 왜곡

정이철 목사는 아래와 같이 방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박영돈교수를 비판한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를 내포하는(특별계시를 보충하는) 계시적인 은사였다. 쉽게 말하자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보고서 불신앙했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방언이 있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나타났다. 최초의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에서는 삼 천 명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탄생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방언이 “직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계시를 설명하는 특별계시”라고 단정함으로 방언을 직통특별계시로, 이어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라고 주장함으로써 성경의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 설교”라고 단정한다. 심지어 “이 점에 대해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방언을 직통특별계시, 직통설교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지 흥미롭다. 그가 어떤 성경적 근거로 방언을 하나님의 직통계시이며 직통설교라고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러한 단정적 말투가 영락없이 이단 교주와 비슷하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는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기도의 언어로서의 방언은 구별된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적지 않다.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은 각 지방의 언어를 말하는 기적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듣는 기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외국어를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기적이지 그 자체가 새로운 진리에 대한 직통계시가 아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도 직통계시는 아니다. 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이라는 매개체 없이는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통계시는 아니다. 물론 바울 서신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나님께 받아 바울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통계시라고 하지 않는다. 직통계시는 이단들이 잘 쓰는 용어이다. 개혁주의 성경관은 신구약 66권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의 영감된 말씀임을 주장한다.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성경의 영감은 유기적 영감이지 직통으로 받아 적는 기계적 영감이 아니다. 혹 정이철 목사는 벧후1:21,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는 말씀을 직통계시라고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베드로 사도는 벧후3:1에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라고 말씀한다. 베드로후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베드로가 썼지만 베드로 자신의 지식과 상식과 경험 등이 개입되지 않은 직통계시는 아니다.(*만약 정이철 목사 주장대로 방언이 직통계시이며 직통설교라고 한다면 왜 사도바울은 통역을 요구했을까?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통역하면 그 통역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지 않는가? 통역은 사람의 말이지 않는가? 왜 바울은 방언보다는 통역을 더 중요시 했는가?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라면 바울은 자신의 서신보다 더 권위적인 직통계시 앞에 무릎을 꿇고 경청했어야 하지 않는가? 왜 방언을 자제하라고 하며 통역 없이는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다며 금했던가? 더욱이 바울은 고전14:19에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한다. 만약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라 한다면 어떻게 일만 마디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의 깨달음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보다 낫다는 말인가?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시며 훈계하는 내용을 주로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파당문제, 성찬문제, 음란문제, 의복문제, 부활문제 그리고 은사문제였다. 즉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여러 은사들은 교회들이 지향해야 할 내용이 아니라 지양해야 할 문제였다.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며 직통설교라면 왜 교회를 위한 목회서신서에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을까? 그것은 바로 방언은 교회가 지양해야 할 일종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정이철 목사는 “이전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유대인을 선지자로 세우시고 유대인들의 언어로 예언하시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방인들의 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시니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고린도교회는 헬라 지역에 위치한 교회로서 헬라어가 통용어였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히브리어로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많았지만 헬라어, 아람어, 심지어 로마 제국 아래에서 라틴어까지 사용되었던 고린도지방에서 하나님이 유대인들로 충격 받도록 이방인들의 말로 십자가를 설명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다들 헬라어를 이해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방나라 언어로 십자가를 설명했다고 유대성도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회개를 했을까? 만약 정이철 목사가 말하는 이방인들의 말이 히브리어도 헬라어도 아니라면 어떻게 고린도교회의 유대인들이 이해를 하고 회개를 했을까? 혹 정목사는 통역을 했을 것이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부분이 통역없이 방언을 했기에 사도바울은 통역 없으면 하지 말라고 자제 시킨 것이다.) 정 목사는 복음의 내용보다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현상 자체를 보고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고 두려워하고 회개를 했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이것은 복음의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순절 때 3,000명이 회개한 것은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심으로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 “저희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그들 가운데 초자연적인 성령의 임재 현상들이 나타났으며 베드로가 성령의 권능을 받고 능력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선지서와 다윗의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메시아이며 부활하신 주가 되신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 영감어린 성경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베드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씀을 직통으로 계시해준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께 듣고 배운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고 깨달게 하신 것이다.

 

3. 정이철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을 동일시

정이철 목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것이 성경의 방언의 기능이다.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설교하시는 현상이었다. 그 때에는 교회에 설교자가 없었고, 성경도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친히 말씀하시어야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2018년 4월 17일 접속.)

   

▲ 박영돈 교수가 쓴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왜 초대교회에 설교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는가? 무엇보다 바울과 11사도가 있었고 7 집사들도 있었다. 베드로도 설교했고, 11제자들이 베드로와 함께 설교했다. 빌립도 설교를 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교훈을 했다. 방언으로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개혁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적 가르침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엡2:20). 방언하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은 신사도운동의 주장과 별 차이가 없는 이단적 발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단회적인 직분이며 그들과 선지자들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외에 다른 터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정이철 목사는 이단임에 분명하다.

 정이철 목사는 계속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단들도 사도행전의 방언이 하나님의 직통의 설교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거짓 방언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 다른 신학을 주장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다른 종류의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움직여서 하나님 자신에게 비밀스러운 영적인 기도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하늘의 언어’의 방언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에 두 종류의 방언이 있었다는 이런 주장은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시대와 고린도교회 시대는 동시였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처음부터 바울에게서 신학을 배운 사람이고,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를 동일하게 전파한 사람이다. 바울이 가르친 성령의 은사와 누가가 설명하는 성령의 은사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 무엇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방언의 형식은 반드시 이방인의 언어이고, 하나님이 이방인의 언어로 그리스도에 대해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의 방언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 성경의 방언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완악한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표적이며, 반대로 믿고 순종하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 백성되는 복이 부어졌음이 선포하는 표적이라고 가르쳤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 목사는 위 문장에 있는 대로 “거짓 방언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된 이론”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며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달리 외국어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거짓 이론을 주장하는 자라고 단죄한다. 칼빈은 성경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했고, 개혁주의 영역에서도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을 동일시하지 않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도 정목사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교회 방언을 구분하는 이들을 이렇게 함부로 거짓된 이론이라고 정죄한다. 정죄를 하지 말고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사도행전과 같이 외국어라는 사실을 해석학적, 문헌적, 역사적, 사회적 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먼저 제시했어야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이 뭐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교인들을 헛된 환상을 갖게 하고 대외적으로 관심을 끌며 스스로 바른 신학을 세우는 이 시대의 의로운 대선생인 척하는 것은 영락없는 이단 교주의 모습이요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는 거의 동시대에 기록되었고 누가와 바울은 동역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말씀한다. 외국어라고 한다면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표현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듣는 자가 없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그 외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보다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러한 언어이며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외국어였다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전 14:22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니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말씀한다.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겠는가? 따라서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표적(sign)이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기 밖의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다.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한다면 방언 자체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방언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파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14:21에서 인용된 사28: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에서 다른 방언은 바벨론 혹은 앗수르 제국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 언어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 본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 28장의 다른 방언, 즉 바벨론 혹은 앗수르 제국의 언어가 표시하는 즉 표적은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반면에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믿지 않는 자들의 표적이라고 한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원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고전14:21에 이사야 28:11을 인용했다고 해서 고전14장의 방언이 외국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4. 바울의 “다른 복음”(고후 11:3, 4)을 거짓방언으로 곡해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계속 주장한다.

박영돈 교수 등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에서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른 이상한 기도의 방언이 나타났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에 기도를 위한 방언이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박영돈 교수처럼 다음의 성경구절을 근거로 주장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과연 위 말씀이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했음을 의미하는 내용일까?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고 있음이 전제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고 '영'으로는 기도하므로 '마음'으로는 그 기도의 내용과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 과연 바울의 신학일까? 바울이 그런 내용을 가르쳤던 사람이었나?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 대체 바울은 왜 이런 이상한 말을 했을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보다 약 5개월 후에 쓰여진 고린도후서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를 떠난 후 이단들이 고린도에 찾아가서 거짓된 가르침을 베풀었고, 고린도 신자들이 바울에게서 배운 것을 버리고 이단들이 가르친 것을 따라갔다고 심각하게 책망했다. 즉,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고 한탄하면서 책망했었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2018년 4월 17일 접속.)


우리는 위 문장에서 정이철이 고린도의 방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그가 사용한 용어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었다.”

2. “고린도에 나타난 이상한 방언기도 운동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었다.”

3. “바울은 이상한 거짓 방언기도의 은사에 빠져 이단의 길로 가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마귀가 하와를 미혹하였던 것처럼 이미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위 정이철의 주장을 요약하면 고린도교회 방언은 “성령이 주신 은사”가 아니고, “이상한 거짓 방언”으로 “이단들이 고린도교회를 미혹하여 심어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곧 이단들이 고린도교회에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거짓 방언, 이단적인 방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이처럼 정이철은 사도행전과는 달리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닐 가능성 있는 내용이나 주장은 다 이단적 행태나 거짓 방언으로 정죄한다.

그 예로 고전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는 구절이다. 여기 “내가 만일”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이것은 가상적(hypothetical) 표현이지 바울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말씀한다(고전14:18). 따라서 14절 말씀은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나 자신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며 바울 자신을 예로 들어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있는 것이다.

정이철 목사는 자신의 의견을 일단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맞추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어떻게 이 구절을 두고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위적 주장을 할 수 있는지 매우 흥미롭다.(*정이철 목사는 “바울이 인간의 인격 안에서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영'과 '마음'이 따로 작용하고 일한다는 것은 이방종교의 사상이지 기독교 사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단들의 해석방법이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방언을 다루면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말을 전하지 말고 통역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방언으로 기도해도 깨닫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의미로 바울은 말씀하신 것이다. 정이철목사는 무지하게도 “마음”(νοῦς)을 영과 비슷한 개념의 마음(mind)으로 이해하고 있다. 14:19,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헬라어 원문에는 없는 “깨달은”이라는 단어를 한글 성경은 넣었다. νοῦς를 한글성경은 “깨달은 마음”으로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πέντε λόγους τῷ νοΐ μου 혹은 πέντε λόγους διὰ τοῦ νοός μου 로 되어 있다. “내 마음의 다섯 마디”라는 것이다. 원문의 마음(τῷ νοΐ 혹은 τοῦ νοός)은 영어로 intellect, 한글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즉 영으로 기도해도 나는 지적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그 다음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주시는 권면이다. 거짓 이단들을 빗대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이철목사 말대로 바울은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영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여기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해도 그 뜻을 깨닫고 기도해야 하고 방언으로 찬송해도 그 뜻을 깨닫고 찬송해야 한다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정이철 목사는 특유의 이단 해석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고후 11장에 언급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고린도교회에서 직통계시가 아닌 기도로서의 방언을 하는 사람들과 단정적으로 연결시킨다. 고후 11장의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을 받고 다른 복음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유대주의자들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를 유대 왕국의 회복자로 보는 유대주의자들이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는 수신자가 같지만 그 목적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정이철 목사는 이단처럼 이들을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5.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 사이비로 정죄

끝으로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박영돈 교수를 비방한다.
 

고신의 조직신학 학과장이라는 박영돈 교수가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을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의 방언은 하나님이 직접 설교하시는 계시적인 은사가 아니었고,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아마 박영돈 교수의 신앙성장 과정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 형성된 모양이다.(정이철, “박영돈 교수, 성경의 방언은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은사: 박영돈의 책<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서평 4-1,” 2018년 2월 10일.  2018년 4월 17일 접속.)
 

정이철은 위 글에서 “이단들이 주장하는 고린도교회의 비밀의 방언기도 이론”, “어떤 유형의 이단과 밀접했으므로 이런 사이비 신앙”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단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방언이론, 이런 것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의 이단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이철은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사이비 신앙”으로 정죄한다. 목사의 탈을 쓰고, 아니 신자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한 신실한 신학자이며 목사인 사람을 비방하고 모욕을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무서운 저주를 퍼부을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방언을 “사탄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이단들을 통해 뿌린 거짓 영의 씨앗”이라고 단죄하였는데 자신과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고 이렇게까지 모욕을 주는 정이철 목사가 오히려 마귀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보인다. 사탄이라는 말의 뜻은 대적하는 자, 모함하는 자이다. 방언을 인정함으로 자신과 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거짓의 영으로, 이단으로, 다른 예수를 따르는 자로 모함하고 적을 만드는 정이철 목사는 전형적인 사탄의 자식의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깎아내리고 자신을 치켜세우고 의롭다 만드는 그는 영락없는 현대판 바리새인이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점점 더 방언에 대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국내 총신과 고신을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교에 재직하는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누구도 계시의 방편으로 방언을 인정하는 신학자는 없다. 특별계시는 종결되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방언은 각 지방 언어이지만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기도의 수단으로 보고 방언을 인정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특별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정죄하거나 그런 입장의 신학자들을 반개혁주의 신학자로 매도하는 것은 개혁주의 안에서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나 칼 매킨타이어 노선의 신근본주의 분리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심지어 은사중지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개핀 교수도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의 개혁주의 안에 이론으로 여기고 다른 견해를 인정하고 존중했다.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과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고 그것도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인정한다고 해서 누구도 정이철 목사처럼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비방하고 거짓 영이라고 정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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