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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차는 신사도운동 및 극단적세대주의자

데이비드 차의 저서 ‘마지막 성도’를 통해 본 황당한 주장들

김문제 | 기사입력 2024/05/12 [16:35]

데이비드 차는 신사도운동 및 극단적세대주의자

데이비드 차의 저서 ‘마지막 성도’를 통해 본 황당한 주장들
김문제 | 입력 : 2024/05/12 [16:35]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각종 음모설을 퍼뜨리고, 극단적 세대주의에 입각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 그 사람이 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인기 강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차(31세, KAM 대표)라는 청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한국교회의 타락상을 부각하고 신사도 운동에 기초한 7개 영역의 회복, 왕의 군대의 출현을 주장합니다. 한국교회에 매우 혼탁한 기류를 형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마지막신호>(예영)에 이어 <마지막 성도-다시 오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마지막 때의 성도들의 삶>(KAM)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데이비드 차는 두번째 책, <마지막성도>에서 어떤 주장과 발언을 할까요. 성도들의 분별력 있는 신앙을 위해 이인규 대표(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가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A4용지로 21페이지가 되는 글입니다. 긴 글입니다만 데이비드 차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사려됩니다. <편집자주>

 

세계중앙은행, 세계단일정부, 단일종교

     
▲ 데이비드 차의 두번째 책, <마지막성도>(KAM)

세계중앙은행이나 세계단일정부, 또한 단일종교는 어느 곳에도 시작된 적이 없다.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것을 미리 상상하여 그것을 마치 종말론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이해하기 어렵다. 일부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되고 있는 것과 단일종교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동성애는 종교가 아니다. 동성애의 합법화가 시작되면 단일종교가 시작한 것인가?

   

 

▲ 데이비드 차형규 목사는 베스트셀러「마지막 신호」    

데이비드 차의 치명적인 오류: 시온 의정서
데이비드 차는 <마지막 성도>에서 케케묵은 조작된 반유대 문서론을 다시 끄집어 내어 음모설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전편인 <마지막 신호>에서 주님의 계시를 받아 책을 썼다는 데이비드 차는 조작된 위서를 베끼고 있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고 있으며, 그의 계시는 모두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증거하여 준다.

 

1905년에 <시온의정서> 또는 <시온 장로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라는 문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간략하게 말하면 유대인들이 세계 정복의 야욕을 갖고 비밀회의를 통하여 채택한 의정서라는 문서이다. 그 내용은 24장까지 있는데 실제 그 주요한 제목의 내용은 데이비드 차의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과 다르지만, 일단 데이비드 차의 책에 있는 그대로 인용한다.

 

1. 힘은 곧 정의요 진정한 권력이다.
2. 전쟁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3. 우리의 상징은 뱀이다. 경제력으로 세계를 장악한다.
4. 혼란을 조장하고, 물질주의를 확산시켜 종교와 신앙을 대체시킨다.
5. 오락(음악, 영화)으로 대중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타락시킨다.
6. 정치인들을 부패시켜라.
7. 군사력을 강화하고, 언론을 조작해 전쟁을 일으켜 이득을 취한다.
8. 전문가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유리한 법제를 만든다.
9. 자유라는 독에 취하게 하라.
10. 약점 있는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워 배후에서 조정한다.
11. 일시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켜라
12. 언론을 통제해 대중의 심리를 조종한다.
13. 대중들을 혹사시켜라.
14. 세계정부에서 기독교를 말살시킨다.
15. 세계정부는 대항자를 엄히 처벌한다.
16. 역사를 조작하고, 새로운 철학을 주입시킨다.
17. 인간을 개조하고 서로 고발하게 만들어 확고한 독제체제를 구축한다.
18. 정보를 장악하라.
19. 대중에게 철권정치의 위력을 과시한다.
20. 각국 정부의 부채를 늘려, 국민을 경제적 노예로 전락시킨다.
21. 국채발행을 통한 부채증가
22. 복지사회를 통한 부채 증가
23. 신세계 질서
24. 우리의 왕

 

과연 유대인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세계정복을 계획하는 문서를 만들었다면 그 문서가 그렇게 쉽게 외부로 유출이 될 수 있었을까? 또 그 문서가 모두 공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문서에 기록된 그대로 세계정복을 진행하고 있을 만큼 바보들인가?

     
▲ 이리유카바 최의 시온의 칙훈서

반유대주의 측에서는 ‘시온장로의정서’를 유대인의 ‘세계 정복 강령’이라 하여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데에 그 문서를 사용했다. 반면 유대인 측에서는 ‘금세기 최대의 위서’라고 하여 극구 부정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시비 논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각국마다 계속 번역판이 거듭하여 날개 돋힌 듯 팔렸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본 작가가 쓴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 책이 <그림자정부>라는 책을 쓴 이리유카바 최의 <시온의 칙훈서>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조작된 위서라고 결론이 난 ‘시온장로의정서’라는 문서를 근거로 쓴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또다시 데이비드 차가 내세운 것이다.

 

그 증거로 데이비드 차의 <마지막 성도>의 276쪽의 각주를 보면, 1부의 41개 각주 중에서 27개가 이리유카바 최의 <시온의 칙훈서>를 인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세계정복의 야욕을 꿈꾼다는 <시온의 칙훈서>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미국 앨라바마 대학 석좌교수인 스티븐 레너드 제이콥스는 <시온 의정서>라는 책을 썼다. 그는 ‘시온의정서’라는 문서가 반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고의적인 목적으로 조작한 문서라는 구체적인 증거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미 그 문서가 조작이라는 최종 법정판결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온장로 의정서>라는 문서는 사실인 것처럼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다. 1934년 스위스 바젤에서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이 가짜 의정서 책을 배포하는 인쇄업자를 상대로 재판까지 벌였다. 대법원은 이 작품은 분명한 표절 작품이라고 판시함으로서 승소했고, 1993년에는 유대인 출판업자 탕크레드 골렌폴스키가 모스코바 법정에서 이 책이 허위 조작이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 대중의 음모론과 호기심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온장로 의정서>는 프랑스 정치 풍자가, 법률가인 모리스 졸리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1864년 제네바에서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의 지옥에서의 대화>(…대화)라는 책을 썼는데, 소위 군주론으로 유명한 마키야 벨리와 몽테스키외가 지옥에서 대화를 하는 가상의 소설이다. 그들이 전제군주가 되어 국가의 권력을 휘어잡는 방법에 대해서 풍자 형식으로 쓴 내용이다.

 

이 책은 당시 독재 권력을 향해 치닫는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3세(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조카)를 풍자한 내용으로, 프랑스에서는 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발행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점차 프랑스로도 유입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저자인 졸리는 이 때문에 붙잡혀 15개월 징역형을 당했다고 한다.

 

1897년에서 1903년 사이에 러시아의 비밀경찰인 표트르 라치코프스키와가 <…대화>를 모방하여 만든 위작이 바로 <시온의정서>다.

<시온장로의정서>는 이 대화록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든 표절 작품으로 비판받고 있다. <…대화>에 등장하는 악독한 전제군주를 고의적으로 유대인으로 바꾼 것이다. <시온장로의정서>는 1903년 처음 러시아에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이 만들었다고 하면서도 히브리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이 문서가 소개된다. 그 이유는 후에 밝혀졌지만 당시 파리 주재, 러시아 비밀 경찰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온장로의정서>의 조작과 표절 내용은 1921년 8월 런던 타임즈에서 일하는 필립 그레이브스라는 기자가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조목 조목 밝혀서 기사화시킴으로서 그 사실이 세상에 드러났고, 그 해 9월에는 뉴욕 타임즈에도 조작된 문서라는 것이 기사화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조작된 문서가 바로 세계를 지배하는 단일정부의 배후가 유대인이라는 음모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조작된 허위문서라는 것이 여러 법정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권위있는 신문기사에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러한 음모설에 대한 책들이 판매되고 있다. 물론 반유대주의의 인사들이 위서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이 책을 유포하고 있다.

데이비드 차는 45쪽에서 이 의정서에 대한 책이 몇몇 나라에서 판매금지를 당하였다고 말한다. 마치 이 책이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어서 정부에서 출판금지를 시킨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최종법원의 판단 결과 위서로 나타났기 때문에 해당 나라에서 출판금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이 책은 세계적으로 수없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구입할 수 있으며, 인터넷에서도 얼마든지 다운을 받을 수 있다. 그 증거로 데이비드 차와 같은 고의적으로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 책을 이용하여 현재도 음모설을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미국 앨라바마 대학 석좌교수인 스티븐 레너드 제이콥스는 일본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판매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일본에는 단지 1,500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꼬고 있다.

 

아래는 <…대화>(위)과 <시온의정서>(아래)의 비교 내용 일부분이다. <시온의정서>와 <…대화>의 문장이 거의 비슷하므로 베낀 것임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서 그 당시 런던 타임즈 기사와 함께 번역을 한 자료를 찾았으나, 자료의 실명을 알 수가 없다)

Dialogue in Hell Between Machiavelli and Montesquieu (몽테스키외 대화록)
How are loans made? By the issue of bonds entailing on the Government the obligation to pay interest proportionate to the capital it has been paid. Thus, if a loan is at 5%, the State, after 20 years, has paid out a sum equal to the borrowed capital. When 40 years have expired it has paid double, after 60 years triple: yet it remains debtor for the entire capital sum. (Machiavelli)

 

The Prtocols of the Elders of Zion (시온 의정서)
A loan is an issue of Government paper which entails an obligation to pay interest amounting to a percentage of the total sum of the borrowed money. If a loan is at 5%, then in 20 years the Government would have unnecessarily paid out a sum equal to that of the loan in order to cover the percentage. In 40 years it will have paid twice; and in 60 thrice that amount, but the loan will still remain as an unpaid debt. (Prtocols,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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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 in Hell Between Machiavelli and Montesquieu (몽테스키외 대화록)
Like the god Vishnu, my press will have a hundred arms, and these arms will give their hands to all the different shades of opinion throughout the country. (Machiavelli, p141)

 

The Prtocols of the Elders of Zion (시온 의정서)
These newspapers, like the Indian god Vishnu, will be possessed of hundreds of hands, each of which will be feeling the pulse of varying public opinion. — Prtocols, p.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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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 in Hell Between Machiavelli and Montesquieu (몽테스키 대화록)
Now I understand the figure of the god Vishnu; you have a hundred arms like the Indian idol, and each of your fingers touches a spring. (Montesquieu, p 207)

 

The Prtocols of the Elders of Zion (시온 의정서)
Our Government will resemble the Hindu god Vishnu. Each of our hundred hands will hold one spring of the social machinery of State. (Prptocols, p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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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 내용에서 유대인들이 3,500년간 믿어왔던 유일신에 대한 신념과 전혀 논리적으로 부합되지 않는 ‘비슈누’라는 힌두교 신의 명칭이 거론되었다는 자체가 누가 보아도 그 문서는 유대인이 쓴 글이 아니라는 확신을 줄 수 있다. 더욱이 수많은 용어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전혀 아니었으며, 일반적인 기독교의 용어라는 것이다.

위키 백과나 네이버 백과, 두산 백과 등을 검색하여도 <시온장로의정서>가 조작된 위서라는 내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과연 데이비드 차가 책을 쓸 때에 이 정도의 검색을 해보지 않았을까?

 

그럼 누가, 왜 이 시온 의정서를 만들었을까? 

 

 

     

▲ 러시아어로 기록된 시온 의정서

 

“In 1944 German writer Konrad Heiden identified Golovinski as an author of the Protocols” Radziwill’s account was supported by Russian historian Mikhail Lepekhine, who published his findings in November 1999 in the French newsweekly L’Express. [28] Lepekhine considers the Protocols a part of a scheme to persuade Tsar Nicholas II that the modernization of Russia was really a Jewish plot to control the world.”
(1944년 독일 작가 콘라드 하이든은 시온 의정서의 저자가 골로빈스키임을 확인했고, 러시아 역사학자 미하일 레페킨도 이를 지지하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를 근대화 하는 작업을 시작하자,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근대화 작업은 유태인들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꾸미는 짓’이라며 황제를 속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문서는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쳤다. 유대인 대학살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문서는 지금도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있다. 오늘날 데이비드 차와 같은 이런 극단적 세대주의와 신사도운동주의자들이 다시 시온 의정서를 빌미로 악용하여 노리는 목적이 무엇일까? 그들은 바로 유대인과 함께 미국과 자본주의 체제를 세계단일정부를 만드는 세력으로 조작하여, <시온 의정서>를 이용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지금도 신사도운동은 기독교에 대해서 옛 포도주, 헌 가죽부대라고 비난하며, 종교의 영, 사탄의 사냥개라는 비난까지 서슴치 않는다. 신사도운동의 목적은 이 세상을 정치, 종교, 경제, 문화, 교육, 엔터테인먼트 등 일곱산(Seven Mountain)으로 구분하여 그 일곱산을 정복하고 통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이들은 숫자와 모양에 집착하는가?
이들은 숫자에 예민하다. 6도 프리메이슨이고, 5도 프리메이슨이고, 13도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차는 워싱턴기념탑에 대해서 높이가 6,666인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워싱턴기념탑의 공식높이는 169.29m다. 인치로 계산해야 6,664.96 인치가 된다. 반올림을 하여 169.3m라고 높혀 주어도 인치는 6,665.35인치이다. 어떤 이유로 데이비드 차는 6,666인치라고 주장하는가? 참으로 유치하고 저급한 사람들이다.

기념탑 고도가 얼마나 높은 가가 그렇게 중요한가? 전화번호에 666이 들어가면 프리메이슨인가? 집 주소에 666번지가 들어가면 일루미나티인가? 자동차번호에 666이 들어가면 세계단일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인가? 6학년 6반의 6번 어린이는 프리메이슨인가 일루미나티인가? 학교 로고에 삼각형 문양이 들어간 곳도 있던데 그곳도 프리메이슨인가? 크기나 길이가 66.6cm, 혹은 66.6m가 되는 것은 모두 사탄의 신호인가? 아파트나 빌딩 13층의 13호에 사는 사람은 모두 단일세계정부를 위하여 일하는 유대인과 관계있는 사람들인가?

 

적그리스도는 그러한 사소한 숫자나 모양을 따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기독교 자체를 대적하는 총체적인 세력을 뜻한다. 특히 성경에서 666은 이름의 수이며 사람의 숫자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지막 성도> 50-51쪽에서 데이비드 차는 백악관 남쪽의 길이 오각형 별 모양이라고 주장하는데, 정확히 보면 백악관 앞의 꼭지점 부근은 길이 아니다. 고의적으로 선을 연장하여 오각형 별로 만든 것뿐이다. 더욱이 국회의사당 앞의 도형은 프리메이슨의 상징인 컴퍼스와 자의 형상이 아니라 역모양이다. 더욱이 부엉이 형상이라는 것은 억지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토끼의 형상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병적으로 모형에 집착하고 있으며, 어떤 모양이 나온다고 하여도 이들은 프리메이슨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데이비드 차는 워싱턴 DC의 설계를 프랑스 설계사인 피에르 랑팡이 하였다고 말한다. 마치 랑팡이 고의적으로 워싱턴 DC를 프리메이슨의 상징으로 설계한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1791년 워싱턴 대통령이 피에르 랑팡을 설계사로 임명한 것은 맞지만, 1792년 새 수도 설계에 대해서 위원들과 소소한 일에도 마찰을 일으켜서 3월에 랑팡을 해임시키고 측량감독을 하던 엔드류 엘리컷을 설계사로 재임명하였다고 하며, 엔드류 엘리컷은 랑팡의 계획을 많이 반영하였지만, 처음 설계를 수정하였다고 한다.

 

워싱턴 기념탑에 대해서 프리메이슨이 추구하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오벨리스크라고 주장하지만, 원래는 1833년에 그 자리에 조지 워싱턴의 기마상을 세우기로 계획을 하였으나, 1848년에 변경하여 기념탑을 기공하였다고 한다. 즉 워싱턴 기념탑은 랑팡이나 워싱턴대통령과 아무 상관이 없다. 특히 워싱턴기념탑은 이집트에서 갖고 온 오벨리스크가 아니라, 미국에서 직접 만든 건축물로서 작은 규모의 탑이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꼭대기까지 운행을 하는 매우 큰 건물이다.

 

황소 우상에 대한 엉터리 성경인용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출 32:8)

 

데이비드 차는 <마지막 성도> 58-59쪽에서 출 32:8을 인용하며 유럽연합의 황소 상징과 뉴욕 월가에 세워진 황소상을 동일한 사탄숭배 사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출 32:8에 나오는 송아지는 히브리어 ‘에겔’로서 황소가 아니라 송아지(calf), 그것도 뛰어노는 갓난 송아지를 뜻한다.

 

     

▲ 학교 로고에 삼각형이 들어간 초등학교- 이것도 프리메이슨인가

 

그들은 왜 그렇게 모양에 집중하는가? 그들은 뱀도 프리메이슨을 상징하고, 황소도 프리메이슨을 상징하며, 부엉이도, 독수리도 프리메이슨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여자의 형상도, 눈동자도, 물고기도 프리메이슨이라고 한다. 또 피라밋, 오벨리스크, 태양, 오각형, 삼각형, 원형, 역십자가, 육각형도, 나무 모양도, 두 개의 기둥도, 해골도 모두 프리메이슨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도형은 역삼각형의 컴퍼스와 자 외에는 밝혀진 바가 없다.

 

GPS가 결합된 전자 칩

<마지막 성도> 68쪽에서 저자는 “모든 시민들에게 전자 칩을 이식하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항상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미래의 사실을 당연화시키고 있다. 어느 국가와 정부도 국민들에게 전자칩을 의무화하거나 이식시킨 경우는 없으며, 그럴 계획을 갖고 있는 곳도 없다.

 

엉터리 성경인용

”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데이비드 차는 67쪽에서 유비쿼터스를 설명하면서 아래 성경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성경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공동번역] 너 다니엘아, 이 말씀을 비밀에 붙여 마지막 그 때가 오기까지 이 책을 봉해 두어라.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깨쳐 잘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갈팡질팡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그러나 너 다니엘아, 너는 마지막 때까지 이 말씀을 은밀히 간직하고, 이 책을 봉하여 두어라. 많은 사람이 이러한 지식을 얻으려고 왔다갔다 할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다니엘아, 너는 이 예언을 책에 기록하여 인을 쳐서 봉하고 마지막 때까지 잘 간수하여라.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지식을 쌓으려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할 것이다.”

 

눅 17:28-30의 오역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눅 17:28-30)

 

78쪽에서 저자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직전 상황을 보면 그곳에는 동성연애가 사회에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본문을 인용하는데, 저자는 마치 누가복음 본문을 동성애가 성행할 때에 인자가 나타났다고 해석하는 것 같다. 또한 동성애가 마치 종말의 징조와 같이 주장하는데, 성경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며, 예를 들자면, 바로 앞의 구절에서는 노아의 경우가 언급되는데, 노아의 경우에는 동성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눅17:26-27)

 

본문은 예수의 재림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과 그 때에 있을 최후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눅17:22-24)

고후 4:4의 오역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저자는 186쪽에서 고후 본문을 인용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프리메이슨집단이 어떻게 사탄을 숭배하면서 문화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류열풍이 세계단일정부 문화운동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과연 성경본문이 한류열풍이 세계단일정부의 실체라고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인가?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을 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전하는 가짜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 바로 뒤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 4:5)

 

니므롯과 바벨탑
저자는 193쪽에서 니므롯이 (1) 바벨탑 공사를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2) 니므롯이 노아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복수였다고 주장한다 (3) 그리스 신화가 니므롯의 가나안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어느 성경에 있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저자는 고대 유대사를 인용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데이비드 차의 진리적인 기준은 전설따라 삼천리가 기록된 고대유대사인가?

 

“역사의 기록에서 바벨탑 공사를 주도한 사람을 니므롯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함의 자손인 니므롯이 노아의 장자권인 셈의 성들을 지배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제사가 사라지고 전쟁과 무력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 문화는 세계로 퍼지게 된다. 함의 후손 니므롯에 의한 가나안의 반란은 노아와 그의 하나님에 대한 복수였다. 그들은 사단에게 사로 잡힌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그리스 신화는 모두 니므롯의 가나안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니므롯과 가나안은 다르다. 함의 아들 중에는 구스와 가나안이 있었는데, 구스의 아들이 니므롯(대상 1:10)으로서, 가나안과 다르며 형제도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 신화가 니므롯의 가나안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창 10:6-9).

 

또한 바벨탑에 대해서는 함의 족속이 세운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노아의 후손들을 창세기 10장 32절까지 언급하고, 11장1절에서 노아의 후손들이 모두 구음과 언어가 같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이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시날평지에서 바벨탑을 쌓았다고 기록할 뿐이다. 게다가 니므롯이 노아의 복수를 하나님께 하였다는 주장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또한 유럽의회의 본부건물이 바벨탑이라고 주장하는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바벨탑 그림은 어느 화가가 상상으로 그린 바벨탑 그림일 뿐이며, 화가의 그림은 피라밋형이고 무너진 상태이며, 유럽의회 본부는 원통형으로 전혀 다르다.

 

게다가 니므롯이 모든 종교의 뿌리(195쪽)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자 맘대로 종교의 뿌리를 만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데이비드 차는 에스겔 8:14-16을 인용하여, 담무스와 태양신이 동일존재라고 주장하는데, 성경을 보면 겔 8장14절에서 북문의 여인들이 담무스를 애곡하였고, 겔8장16절에서는 정문 앞에서 약 25인이 동방의 태양에게 경배하는 것이었고, 저자는 담무스와 태양신을 동일한 신으로 보지만,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각각 숭배되는 다른 신으로서,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을 보면 담무스는 수메르인들의 신으로서 매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며, 태양신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담무스와 태양신은 동일존재가 아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 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겔8:14-16).

 

저자는 고대 설화까지 조작하고 만들고 있다. 194쪽에서는 니므롯이 자신을 태양신으로 하고 그의 아내 세라미스를 여신으로 숭배하게 하였고 그의 아들 담무스가 니므롯이 환생하였다고 선포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가페성경사전(307쪽)은 담무스가 수메르와 바벨론의 농경신이었다고 말하며, 275쪽에서는 니므롯은 신적존재가 아니라 유명한 인물로 언급된다. 디럭스바이블 성경사전도 니므롯에 대해서 바벨론 비문에 있는 전설적인 인물 혹은 국가적 영웅으로 언급한다. 지식백과도 전설적인 인물로 말하며 동일하다. 지식백과는 담무스에 대해서도 식물신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이집트의 뱀 형상까지 동일한 신으로 주장하는데, 저자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니므롯=담무스=태양신=뱀=사탄=여신숭배 사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이러한 우상들은 나라마다 종족마다 다른 존재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4-6)

 

저자의 수준을 알 수 있는 허무맹랑한 주장
저자는 196쪽에서 스탠포드연구소가 비틀즈의 음악에 백워드 음원을 삽입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백워드에 대해서 저자는 구체적으로 3가지로 설명하는데 (1) 마약을 할 것 (2) 프리섹스를 할 것 (3) 부모님을 거역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허황된 거짓말로 증거된 예전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저자는 위 성경구절을 인용하는데, 위 성경본문이 비틀즈의 음악의 백워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저자가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거의 관련이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저자는 197-198쪽에서 로스차일드가가 프랑스 칸 영화제를 후원하고 있어서 반기독교적이고 성적표현을 하는 영화에만 상을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 영화제에는 기독교심사위원상도 있다는 것을 데이비드 차는 몰랐던 것 같다. 그 유명한 Out of Africa 라는 작품이 칸 영화제에서 기독교영화상을 받았다.

 

     

▲ 기사 작위를 받은 이수만 씨

 

또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이 로스차일드 와인회사에서 주는 기사 작위를 받았으므로 그 이후에 발표된 소녀시대와 샤이니 노래들을 백워드하면 세뇌를 하는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요즈음 미국을 강타한 싸이를 프리메이슨이라고 하는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싸이는 SM 소속이 아니지 않는가? 데이비드의 이러한 주장은 유치하다 못해 삼류 코메디를 연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로스차일드 와인 회사에서 주는 기사 작위는 홍콩 배우 성룡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배우 정준호와 영화감독 임권택도 받았으며, 김우식 전 연세대학교 총장과 서정호 앰버서더호텔 회장도 받았다. 이것은 실제 기사 작위라기 보다 친교적인 명예 기사작위에 해당한다.

 

저자는 요한계시록 17:5, 18:2-4, 18:7-8, 18:20, 19:1-2을 인용하면서 바벨론의 우상숭배가 프리메이슨에 의하여 사탄의 문화로 전해진다고 주장을 한다. 과연 성경 계시록본문들이 프리메이슨을 뜻하는가?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AD 90년경에는 바벨론이 이미 멸망되었다. BC 331년에 알렉산더 제왕에 의하여 완전히 헬라제국의 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요한은 바벨론이라는 단어를 “큰 성,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반기독교적인 총체적인 세력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음녀’라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변절한 이스라엘과 우상숭배를 하는 이방인들로 비유한다.

 

저자는 이 바벨론을 실제로 바벨론의 신으로 간주하여, 요한계시록을 프리메이슨을 경고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계시록의 666을 베리칩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경과 신학적인 지식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원론적인 위험한 주장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데이비드 차는 207쪽에서 매우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와 사단의 역사를 한 축에 연결된 두개의 바퀴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두 바퀴를 연결하는 축은 성경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런 비유가 옳다고 생각이 드는가?

 

특히 이사야 45:7을 인용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본문에서 어두움이 사탄을 뜻한다면 빛은 무엇인가? 저자는 209쪽에서 사탄의 전략에 대해서 설명하며,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모두 창조하신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빛은 무엇이며 빛이 창조되었는가?

 

물론 하나님이 사탄을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고, 사탄도 하나님의 허락 한계 안에서 역사할 수 있다는 뜻이라면 그것까지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두 바퀴를 하나님과 사탄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망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더욱이 사탄이라는 바퀴가 성경말씀의 축으로 움직이는가? 저자는 208쪽에서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사탄이 어떻게 움직여도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이라는 틀 안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한 축에 연결된 두 개의 바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움직여도 역시 사탄도 함께 움직인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가?

 

극단적 세대주의
저자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여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세대주의를 지지한다. 물론 데이비드 차가 자신의 주장이 어떤 흐름 가운데 있는지 알고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저자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복의 중심에 있는 이스라엘을 은폐하기 위하여 사탄은 2000년 역사 동안 어떠한 일을 통해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을 제거해 버렸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217쪽)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세대주의를 주장해야 사탄이 제거하지 않은 순수한 회복을 아는 것이고 세대주의를 모르거나 반대하면 사탄이 제거한 것을 그대로 따라 움직이는 ‘사탄 신학’으로 간주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37:11-13)

 

저자는 많은 성서학자들이 1948년 이스라엘이 세계사에 새롭게 등장할 때까지 에스겔 37장 11-13절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을 이스라엘 회복의 시작으로 보는 전형적인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의 주장이다. 저자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을 “세상 임금인 사탄의 종말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220쪽)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차에 의하면 세대주의가 아닌 신학은 모두 ‘사탄 신학’ 되는 것이다. 데이비드 차는 이것을 대체신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세대주의에서 정통신학을 대체신학이라고 부른다.

그는 221쪽에서 에베소서 2:14-18을 인용하며, 소위 대체신학을 비판하는데, “이 대체신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인 이스라엘과 이방교회의 연합이 2000년간 철저하게 무너졌으며 원수관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베소서 본문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회복이 별도로 신약의 교회와 다르다는 세대주의를 부정하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별없이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권속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대주의는 신약의 성도와 구별되어 이스라엘이 회복됨으로서 별도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지만, 본문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함께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2-19).

 

데이비드 차는 227~228쪽에서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비유를 인용하여 세대주의를 지지하고 있는데 롬 11:27~28까지만 인용한다.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7-18)

 

그러나 데이비드 차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로마서 본문은 두 개의 뿌리를 말하는가, 하나의 뿌리를 말하는가? 참감람나무의 뿌리는 하나이며, 원가지(이스라엘)가 찍혀 나가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이방인)의 가지가 접붙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롬 11:21-24)

 

원 이스라엘이 후에 회복되기 위하여 보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은 그 자리에서 찍혀 나가고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 대신 접붙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뿌리는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세대주의의 비판
세대주의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이스라엘과 신약교회(이방인)의 구분이며, 이들의 연관성과 지속성은 단절된다.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국을 하나님의 구약 백성에게 주려고 가져왔으나 그들이 그를 거부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왕국은 일단 보류 혹은 연기되어 한쪽에 제쳐 놓았고, 하나님은 전혀 다른 세대, 즉 교회 시대를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즉 신약교회의 시대는 이스라엘과 왕국 사이에 있는 시대가 된다. 이 세대주의의 특징은 교회 시대의 마지막 시점에서 교회는 7년 환란 전에 이 세상 밖으로 휴거될 것으로 본다. 그리고 하나님은 보류시켰던 이스라엘을 위한 구약의 계획으로 다시 되돌아가신다는 것이다. 그 계획은 타락한 왕국을 회복된 이스라엘로 이끌어 오시는 것을 말한다. 즉 세대주의가 주장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며, 미래적이며 즉 전천년왕국이다. 신약교회가 휴거를 받은 후에야 이스라엘의 회개가 있을 것이고,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이 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 세대주의적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6-10)

 

구약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다시 말하여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옛 언약이 잠시 보류되었고,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또다른 언약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옛 언약이 폐하여진 것이며 새로운 언약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과연 히브리서 기자는 자의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였을까? 이러한 주장은 바로 구약 예레미야서를 반영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새 언약을 세운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1-33)

 

이스라엘과의 옛 언약은 보류된 것이 아니며, 그 약속의 유효성이 지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어김으로서 파하여진 것이다. 이 약속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한 그 첫 언약이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그렇다면 새 언약은 무엇일까? 새 언약은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을 말한다. 즉 예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은 자발적으로 예수를 믿는 모든 민족으로 적용된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5)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12)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다시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고 동서로부터 온 다른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이 보류된 것이 아니라, 동서로부터 오는 많은 사람들로 천국의 자리가 대체되어진 것을 뜻한다.

 

마 22장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의 비유는 더 이상 천국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청함을 거부할 때에 그것이 보류된 것이 아니라, 대신 다른 손님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즉 혼인잔치에서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초청을 거절하자 이방인들로 그 자리가 대신 채워진 것이며, 그것은 나중에 다시 이스라엘이 초청을 받는다는 내용이 결코 아니다.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은 많으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은 적다는 것은 보류가 아니라 거부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경적인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믿는 자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재해석된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7-9)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모든 혈통과 종족과 관계없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다시 강조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7-29)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그 언약이 지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로 택하신 영적 개념의 백성으로 재적용된다. 이스라엘이란 개념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영적인 개념으로 재해석될 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었으며, 육신의 자녀가 아닌 영적인 자녀로 재조명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위의 로마서 9장 6절 본문의 이스라엘이란 단어 중, 전자는 육적이며 혈통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지만, 후자의 이스라엘은 영적이며 신실한 내면적인 믿음의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 하셨을 때에(요 1:47),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것으로서 혈통적인 의미가 전혀 아니었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혈통적인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된 것이며, 제사장이 되며, 그의 나라가 되고, 소유된 백성이 된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였고, 하나님은 그 나라를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에클레시아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베드로가 보았던 환상은, 결코 음식물에 대한 율법이 아니라 베드로가 가진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율법주의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또한 예루살렘의 거룩한 성은 이스라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 것이 아니며,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오게 된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적 개념은 신약에 와서 교회라는 선택적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이제 신실한 내면적 믿음으로 자발적인 참여를 한 하나님의 참 백성이 그 새예루살렘 성의 기둥이 될 것이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또한 예수님은 믿음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삼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30)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진정한 이스라엘의 조건은 표면적이거나 육신적, 혈통적이 아니며, 내면적인 신령과 마음에 있는 것이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세대주의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이방인들의 교회를 세웠으며, 그 교회가 형성된 후에 다시 유대인들이 회심을 함으로서 유대인만의 왕국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많은 성경구절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다. 그나마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은 행 1:6 뿐이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언제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이라고 말씀하셨다. 세대주의 학자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회복되지 않는다”고 답변을 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때와 기한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셨을 뿐이며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답변을 주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답변은 1장8절에서 나타난다. 성령이 임하면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들에게 전파되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나라의 확장이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하신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성경구절은 또 하나가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5-26)

 

과연 본문에서 “온 이스라엘”이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가르킬까?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접붙힘이 언급된다, 즉 이방인은 새로운 별도의 분리된 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뿌리에 접붙힘을 받는 것이다.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는 구절의 뿌리는 다른 뿌리가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뿌리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뿌리가 아니라 원 가지일 뿐이며 원가지들은 찍혀 나가게 될 것이다.

 

온 이스라엘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로 선택된 이스라엘만을 뜻한다고 본다. 그러한 해석이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기 까지”라는 앞부분의 의미에 적합하다. 충분한 숫자의 이방인들이 들어오면 완악하지 않았던 남아있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이며 뿌리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일 뿐이다. 뒷 구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롬 11:30)

 

개역성경은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라고 번역함으로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 순종치 않은 것처럼 잘못 번역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였다는 뜻이다.

 

[공동번역] 전에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표준새번역]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현대인의성경]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대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로 택함을 받은 일부 이스라엘을 온 이스라엘로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맞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완악한 이스라엘의 숫자만큼 이방인들이 대신 채워졌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앞 구절에서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힘을 받는다는 내용과도 연결이 된다.

 

하나님은 충분한 숫자의 이방인을 부르시기로 작정하셨고, 또 부르시기로 작정한 남은 유대인들도 부르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남은 유대인들이 곧 온 이스라엘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만약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기로 하셨다면, 본문에 기록된 앞부분의 구절과 뒷부분의 구절은 언급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 될 것이다.

 

또 구약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에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9장8절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12)

 

그러나 신약에서 아모스 본문은 그 이스라엘 자손을 별도로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과 모든 이방인을 함께 포함시키고 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행 15:15-17)

 

데이비드 차는 신사도운동가요 극단적 세대주의자다
데이비드 차는 233-234쪽에서 1897년에 시온주의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과 1901년의 챨스 팔(챨스 파햄)의 방언을 언급한다. 둘 사이의 어떤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챨스 파햄은 감리교 목사였다. 그리고 아주사 부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또한 데이비드 차는 교묘하게 1907년 우리나라의 평양대부흥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챨스 파햄과 아주사 부흥은 신사도운동의 원조인 늦은비 운동의 시작의 동기로 설명해야만 한다. 시온주의 회의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또한 1907년 평양대부흥의 회개운동과 전혀 다르다. 1949년 미국 오순절 교단은 늦은비운동을 이단으로 공식규정했다. 늦은비 운동이 곧 신사도운동의 원조가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사를 왜곡하는 이단들과 유사한 주장
데이비드 차는 어거스틴, 루터, 캘빈의 사상이 초대교회 마르시온이라는 영지주의 이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황당한 비판을 한다. 저자는 245쪽에서 이단들이 왜곡시킨 교회사와 똑같은 가증스러운 주장을 옮기고 있다.

 

“말시온은 영지주의와 이원론적 성경관으로 기독교 전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폴리캅 주교는 이러한 말시온의 이단성을 강조하면서 말시온을 사단의 맏아들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헬레니즘의 성경해석은 콘스탄틴 황제의 가까운 친구이자 조언자였던 유세비우스에 의해 ‘교회사’로 집필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4세기 어거스틴이 이 말시온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의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게 되었다. ···그의 긍정적인 기독교 유산에도 불구하고 말시온의 관점에서의 성경에 대한 접근은 교회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구약적 하나님과 신약적 하나님이란 이중적 잣대로 성경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부터 이어져 온 은혜론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에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러한 가르침은 종교개혁자 루터, 존 칼빈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론’을 통해 율법과 은혜가 상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책은 개신교의 개혁주의의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율법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갖게 된 것이다.”

마르시온은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일부만을 성경으로 인정했고 구약은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자신이 직접 쓴 ‘댓구’라는 책을 성경에 포함시켰으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예수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가현설의 영지주의 이단이다. 초대교회는 마르시온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동일존재임을 천명하였으며, 성경의 정경화를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데이비드 차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마르시온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괴한 주장을 서슴치 않으며, 루터와 캘빈도 그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정통교회를 뿌리채 흔드는 이단집단들의 주장과 동일하다.

기도의 집
또 데이비드 차는 262쪽에서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의 강력한 전쟁을 감당할 믿음의 용사들을 불러내기 위하여 전 세계의 교회를 ‘기도의 집’(House of Prayer) 체제로 바꾸어 나가고 계신다. 그 거룩한 변화의 바람은 결국 세상이 감당치 못할 하나님나라의 강력한 용사들로 무장시켜 어둠이 감당치 못할 거룩한 빛의 신부들이 즐거이 나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도의 집은 이미 IHOP에서 사용한 용어다. 기도의 집 체제로 바꾼다는 주장, 그리고 빛의 신부라는 용어도 신사도운동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다니엘 세대의 부르심
데이비드 차는 264쪽에서 부활에 대해서 이단들과 같은 비성경적이며, 다른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264쪽에서 “십자가에서 자아의 완전한 죽음을 경험할 때야 비로소 부활을 경험할 수 있다. 죽어야 산다. 그렇게 부활을 경험할 때 주님의 지성소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라고 하는데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부활과 동일한 의미를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죽은 자가 신체적으로 새 생명을 얻는 것”이며, 부활은 궁극적으로 예수님 재림시에 이루어진다. 데이비드 차는 죽음에 대해서 “자아의 완전한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경험할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지방교회와 같이 “지성소 안에서 누린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저자는 또 265쪽에서도 “그래서 내가 죽을수록 주님은 그만큼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죽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완전한 죽음 가운데 강력한 부활을 겅험할 것이다. 바로 이때, 우리는 성령님과 완벽하게 호흡하는 왕의 군대로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성경을 이단들과 같이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한 것과 “십자가에서 못박혔다”라고 말한 것은 죄에 대해서 죽고 믿음으로 다시 산다는 것이며, 그것을 부활이라고 표현한 적은 한번도 없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 KAM의 강사진

 

통일한국과 아나톨레의 길
‘아나톨레’라는 헬라어는 ‘동방’으로 번역된다. 헬라어의 의미는 ‘떠오르는 해, 떠오르는 빛’을 의미한다. 데이비드 차는 268쪽에서 이 아나톨레의 길이 한반도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을 하는데,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 정명석 집단 등의 이단들이 동방을 한국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성경에서 ’아나톨레‘는 항상 예루살렘의 동쪽인 터키와 소아시아 지역을 가리켰다.

더욱이 데이비드 차는 2012년에 한반도의 통일의 문이 열리는 기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2012년은 북한과 한국이 가장 긴장감이 높았던 대립의 시간이었다.

 

마지막 선두주자
마지막 선두주자라는 용어도 신사도운동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신사도운동
데이비드 차가 속한 KAM는 의심할 필요도 없는 신사도운동을 하는 곳이며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쉽게 인식할 수 있다. KAM (https://www.kingdomarmy.com)에는 그들의 교육과정이 나온다, 왕의 군대 소집령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Kingdom Army School 학생을 모집하고 있는데, 그 과목을 보면 신사도운동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1. 다윗의 장막의 계시(깊은 예배, 강한 예배, 임재적 예배)
2. 파워 인카운터(삶을 변화시키는 복음)
3. 다림줄(깊은 내적 치유)
4. 마지막 시대
5. 마지막 시대의 성도의 삶
6. 신부의 영성
7. 산상수훈의 삶
8. 성령론
9. 성령의 기름부음
10. 능력전도 복음의 영성
11. 예언 사역
12.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13. 실체적 이스라엘의 회복
14. 하나님나라 재정관리
15. 통일한국과 북한, 이스라엘
16. 요한계시록 전체 강해
17. 요엘서 강해
18. 중보기도의 삶

 

더 놀라운 사실은 강사진이 신사도운동과 극단적세대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수전도단 출신이 6명이라는 사실이다.

예수전도단은 데이비드 차의 이러한 신사도운동적인 성향, 변질된 세대주의적인 종말론과 비정상적인 음모론을 지지하고 후원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 강사진들을 처벌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전도단의 변질과 탈선을 걱정하고 있는데,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가?

 

 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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