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성에 대한 조작을 우려하면서이것은 정이철의 악의와 두날개(김성곤목사)와 장자권의 회복(이영환목사)에 대한 필자의 연구보고서에 대한 보복으로 생각됩니다.
이단성에 대한 조작을 우려하면서 이인규 합동의 이대위원장인 진용식목사는 이번에 저를 조사하는 소위원회의 위원장도 겸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조사하였는데, 저는 충분히 저의 입장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설명이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직접 쓰거나 하지 않은 말조차 제가 주장한 것처럼 조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작은 평소에 정이철목사가 올렸던 글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저를 조사해 달라고 올렸던 노회는 정이철과 그 측근들이 있었던 노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이철의 악의와 두날개(김성곤목사)와 장자권의 회복(이영환목사)에 대한 필자의 연구보고서에 대한 보복으로 생각됩니다. 이 두 단체는 모두 진용식목사의 상담소협회 고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이연(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은 두날개에 대한 문제 때문에 분열되었습니다. 진용식목사와 저는 동역자의 관계였으나, 분열 뒤에는 서로 대적하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이 두 단체를 필자가 제일 먼저 연구보고서를 써서 비판하였습니다. 진용식목사는 이 두 단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저를 이 두 단체와 만나도록 해주었으며, 비판성의 글을 지워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습니다. 특히 두날개는 저에게 사과각서를 쓴 적도 있었고, 협박과 함께 금품 로비를 한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진용식목사가 이 문제가 두날개 때문이라는 것을 직접 말하는 것과, 저에 대해서 거짓조작과 매도를 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녹음화일을 갖고 있습니다 1) 특별계시에 대한 본인의 견해 필자가 쓴 책의 전문 http://cafe.naver.com/anyquestion/58059 카페에 가입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글 http://researchheresy.com/2201 필자는 성경 외의 다른 특별계시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글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필자가 개혁신학을 가지지 않았다고 교류금지를 한다면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기하성과 교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하늘성소에 대한 본인의 견해 본인의 하늘성소에 대한 글(홈페이지에 가입하지 않아도 볼 수 있음) http://researchheresy.com/column/2063 네이버 카페에 있는 하늘 성소에 대한 글(카페에 가입하여야만 볼 수 있음) http://cafe.naver.com/anyquestion/55717 본인은 하늘성소와 십자가를 분리한 적이 없습니다. 이중제사를 주장한 적은 결코 없으며, 오히려 김성로목사에게 자칫 이중제사의 오해가 있는 표현에 대해서 수정할 것을 가장 먼저 설명해 주었습니다 위 두 개의 글은 모두 동일한 내용으로써, 기이협에서 김성로목사에 대한 세미나를 하기 2달 전(2016년 2월)에 쓴 글입니다. 하늘성소에 대한 저의 입장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하늘성소와 십자가를 분리한 적이 없으며, 기이협에서 강의한 파워포인트에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제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의 피로 드리는 희생제사는 단번에 드려진 제사이다 (2) 하늘의 성소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3) 예수의 십자가 희생제사와 하늘성소에 들어가신 것은 분리된 사건이 아니다. 3) 기이협의 세미나는 기이협의 견해를 정리하기 위한 자체 토론회였습니다 기이협(기독교이단대책협회)에서는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목사에 대해서 문제점을 논의하고 정리하기 위하여 2016년 4월에 자체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 자체 세미나에서는 찬성도 있었고 반대도 있었으며, 세밀한 토론도 있었습니다. 이 세미나를 갖은 후에 기이협에서는 김성로목사에게 정리된 견해로서 제의서를 보내게 됩니다. 기이협에서 김성로목사에게 보내는 제의서 http://cafe.naver.com/anyquestion/56602 기이협에서 우리가 김성로목사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 의견을 정리하고 토론하자는 취지에서 한 것인데, 림헌원목사 측에서 몰래 사람을 보내 녹음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부분적인 녹음만을 인용하여 마치 제가 예수님이 자기 피를 들고 하늘에 올라가 제사를 지낸다는 것처럼 조작을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제 견해가 아니라, 메튜헨리의 주장을 소개한 것입니다. 저는 메튜헨리의 주장을 소개하고, 마틴로이드 존스의 견해도 소개하면서 “나는 이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동영상까지 증거자료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날 하늘성소에 대한 세가지의 입장으로 제가 강의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적인 입장, 두 번째는 주석적인 입장, 세 번째는 신학적인 입장을 소개하였습니다. 가능한 여러 가지 견해를 소개하였으며, 제일 마지막에 “필자는 WBC 주석과 권성수교수의 견해를 지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WBC 주석과 권성수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히 9:11-14에서 저자는 15절에서 형성된 결론을 위한 근거를 발전시킨다: 그리스도가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서 종말론적인 구속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WBC 히브리서-하, p.106) “옛 언약의 성막은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 접근과 제한 속죄의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의 완전한 접근과 완전한 속죄로 개혁될 필요가 있었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드디어 새 언약의 중보로 단번에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이다”(히브리서, 권성수, 총신대학교출판부, 263쪽) 4) 저는 예수님이 하늘성소에 올라가서 자기 피를 뿌렸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위 글에서 보듯이, 저는 김성로목사의 주장을 설명하면서, 약 10개의 주석적인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이와 같이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에서 메튜헨리의 견해를 소개하였고, 뒤에서 마틴로이드존스 목사의 견해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메튜헨리의 주장을 본인의 주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조작입니다. 메튜헨리 주석은 히9:12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소나 염소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자신의 피를 들고 하늘에 들어 가셨다.” (메튜헨리 주석) 또한 메튜헨리는 히브리서 9:23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첫째, 희생 제물이 바쳐진 장소가 더 훌륭하다. 율법 아래에서 바쳐진 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이었다(24절).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은 자신이 직접 들고 하늘로 올라 가셔서 하나님 앞에 바치셨다.” 심지어 마틴로이드존스는 히브리서 9:23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따라서 그의 논증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모형은 수소와 염소의 피로 정결케 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하늘의 성막자체를 정결케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하늘의 성막은 더 나은 것으로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은 것으로 정결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자의 피로 정결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9장을 읽고 8장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논증을 파악하기 위해 히브리서 전체를 읽길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신비로운 진술에 속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상적 장소 자체도 정결케 되어야 하며 예수그리스도 바로 자신의 피로 정결케 되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배우게 됩니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마틴로이드존스, 463쪽) 제가 이렇게 다양한 주석을 인용한 것은 히브리서의 해석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다양한 견해는 저의 견해가 아닙니다. 저는 이중제사를 주장한 적도 없고, 김성로목사도 비록 이중제사로 오해를 살만한 내용은 있었지만, 실제로 이중제사를 주장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저는 설명하였으며, 오히려 수년전의 책자에서 김성로목사가 단번에 드려진 제사, 영원한 제사를 강조하는 것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저는 하늘성소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있다고 말한 적은 있으며,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주석과 신학적인 견해를 많이 소개하였는데, 캘빈을 비롯한 많은 조직신학자와 성경 주석도 하늘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히브리서 8장 4절은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하늘성소가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어디에서 제사장이 되셨습니까? 5) 기이협보고서는 잘못된 내용이 아니며, 필자의 글이 아닙니다 기이협 보고서는 기이협에서 세미나를 통하여 견해를 정리한 것으로서,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기이협보고서를 보면 김성로목사에게 용어에 대한 실수를 권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 별지에 첨부한 내용처럼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vicarious atonement)와 ‘부활하셔서 구속하심’(redemption)의 용어적인 개념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은 부활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용어적인 오해가 있었다는 판단입니다. 로마서 4:25의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십자가 사건) 우리의 의롭다하심을 인하여 살아나셨느니라(부활 사건)”는 말씀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김성로 목사님이 다른 책과 교육교재에서 “단번에 드려진 제사”를 반복하여 언급한 것으로 볼 때에, 두 번 제사를 드렸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신학적인 용어에 대한 오해와 부활과 하늘성소에 대한 시간적인 순서를 착각하신 것으로 보여지므로 이단사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기이협 제의서) 이 글은 기이협의 공적인 글로서 필자가 쓴 글이 아닙니다. 필자가 쓰지 않은 글을 갖고 문제를 삼는 자체도 한심한 일이지만, 이 본문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내용을 이해조차 못하면서, 필자가 "속죄와 구속이 다르다"고 했으므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하다니 기가 막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속죄사역을 이루신 것입니다. 김성로목사가 속죄와 구속에서 착각을 하여, 부활이 속죄의 완성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잘못된 용어적인 실수라고 권면하면서 부활이 구속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속죄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구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만약 부활하지 않았다면 구속이 완성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조직신학자들은 부활을 구속의 완성, 성취라고 말합니다. 아래의 신학자들 외에 얼마든지 증거가 있습니다, 그 신학자들도 모두 이단으로 규정하기 바랍니다. 아래 글은 캘빈의 기독교강요입니다. “바울의 다음 말이 그리스도 부활의 성격을 잘 표시해 준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말은 마치 그가 "죽으심으로 죄는 제거됐고 그의 부활로서 의는 다시 살아나 회복되었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만약 죽음에 굴복했다면, 그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겠는가? 또 만약 그가 이 싸움에서 졌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요소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는 죄가 제거되고 죽음이 소멸되었으며, 그의 부활을 통해서는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되살아나 그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능력과 효력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부활의 덕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느니라"(롬 1:4)고 말하였다. (영한대조 캘빈 기독교강요, 미성문화원 CD, 16장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및 하늘에 정좌하심 1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그러나 서방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구원 문제를 논할 때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부활보다 더 강조하여 다루었다. 예수님의 죽음을 속죄(atonement)의 성취로 강조하여 생각하는 태도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는 부활에 대한 강조가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구속의 완성, 구속의 종결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서 구속의 성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대치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구속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더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Gaffin 박사는 바울 신학의 중심주체인 부활을 성도들의 구원과 결부시켜 다룬 다음 예수님의 부활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교의신학, 기독론, 박형룡, 보수신학서적간행회, 201-202쪽)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사건으로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고, 부활이 없으면 죽음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구원에 있어서 죽음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구속의 완성․ 구속의 종결로 이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대칭시켜서는 되지 않지만, 구속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는 부활을 통하여 더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이것이 17절에서 바울이 성도의 구원과 관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강조하는 이유인 것이다.” (한천설 교수, 목회와 신학 2000년 4월호에 “죽은자의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만약 그리스도의 실제적 부활이 없었고 다른 인간들과 같이 죽은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대신해서 구속사역을 주장하는 근거가 없어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로서 악마를 격멸하셨다고 말해도, 실제 이 부활이 없었다고 한다면 즉 죽음의 세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 죽음의 세력이 놓여져 있다고 한다면, 승리하였다는 증명이 없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부활하시므로서 죽음을 격멸하신 사실에 있어서 증거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구속의 완성이 필연적 결과임과 함께 부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증명하는 증거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의신학, 기독론과 구원론, 김준삼, 도서출판 총신, 94쪽) “구원은 몸의 부활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이유입니다. 돌아다니면서 몸의 부활이 없고 영적인 부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 구원이 없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여러분에게 처음 왔을 때 전파한 이 믿음에 굳게 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전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마틴로이드존스,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 기독교문서선교회, 282쪽) “오히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이 구성요소로서 구속사역의 본질, 따라서 복음사역의 본질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가장 큰 기초석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역은 만일 그것이 전적으로 유효적이었다면, 죽음이 아닌 생명에서 종결되어야만 하였다. 더 나아가 부활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성부의 인치심이었으며 그것은 수납(acceptance)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셔서 놓여지신 교회의 머리와 보편적 주님으로서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구의 구속사적 사역의 열매들을 사용케 하셨다.” (벌콥조직신학 하권, 74쪽) <저작권자 ⓒ 목회와진리수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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