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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명상을 해도 되나요?

목회와진리수호 | 기사입력 2024/09/14 [14:17]

그리스도인은 명상을 해도 되나요?

목회와진리수호 | 입력 : 2024/09/14 [14:17]

 

그리스도인은 명상을 해도 되나요?

 

 

▲ 강경호 목사

(한국이단상담목회연구소 소장)    

1. 글을 시작하면서

 

○○신학대학교 은퇴교수인 정○○는 명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인터넷신문에 기고하였다.

명상이 무엇이길래 그런 엄청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김주환에 따르면, 명상은 경험자아인 마음이 만들어내는 내면의 소음(의식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각, 감정, 스토리텔링 등의 소음)을 가라앉히는 것이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고,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고, 통제하고 조절하려는 의도를 내려놓는 것이다. 또한 명상은 일상적인 경험자아(에고)를 넘어 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배경자아(진짜 나)를 알아차리는 것이다.”라고 소개하면서 어떻든 명상의 효과는 대단하다.”라고 하고 있다.

대한○○회 윤○○ 주교는 치유명상 5단계책을 펴내신 분으로 명상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윤주교는 저술한 책에서 자신의 체험을 풀어놓으며 명상의 길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으면서 기독교의 관상(觀想) 기도 전통과 불교의 선(), 위파사나 수행도 소개한다. 그리고 그는 명상은 별것 아니다. 멍 때리기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고 하고 있다. 또한 멍 때릴 때를 생각해보세요. 주변에서 뭐라고 해도 안 들리지요?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지하철이든 시장 바닥이든 명상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하고 있다.

위 두 분은 목회자이다. 목회자분들께서 명상을 좋게 보면서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분들만이 아니라 의외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명상이나 요가를 행하고 있다. 이는 명상(요가)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육신적으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도 될까? 육신의 평안을 얻기 위해 명상을 해도 되는 것일까? 논자는 아니라고 본다.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고 기도하고 있다. 육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영혼이 잘되어야 한다. 그러나 명상을 통해서는 육신의 건강을 위한 도구일 수 있으나 그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잘못하면 접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명상이란?

 

오늘날 사용되는 명상이라는 용어는 인도요가의 8단계 가운데 7단계의, 의식이 어느 한 대상에게 전념한 상태를 가리키는 ‘Dhyana’(디아나)를 번역한 영어의 ‘Meditation’을 일본인이 다시 번역한 것이다. 바로 영어로 명상(瞑想)meditation이라고 하며, 라틴어 ‘meditari’에서 유래된 말로 글자 그대로 깊숙이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명상은 인도의 범어로 ‘Dhyana(디아냐)’이며 중국어로는 선나’(禪那)라 한다. 이것이 지금의 선()으로 알려져 있다. 명상(Dhyana)은 정려(靜慮), 사유수습(思惟修習), 혹은 공덕총림(功德叢林) 등 여러 뜻이 있다. ‘Dhyana’생각한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이에 인도의 명상가 슈리푼자는 그대는 누구인가에서 명상은 디아냐’(dhyana)라고 번역하기보다 다라나’(daharana)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했다. 다라나는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달려가고 있는 마음을 붙잡아 한 대상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명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는 서구적인 명상의 개념으로서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고 깊이 사물을 생각하다.” 혹은 묵묵히 생각한다.” 등을 말하는 것으로 서구 사람들은 명상을 종교적으로 비약시켜 기도나 묵상으로까지 여기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인도적 명상의 개념으로서 디아냐(Dhyana)를 말한다. 이 말은 한역하면 선나(禪那)라고 음역하거나 사유수(思惟修)라고 의역하거나 또는 정려(靜濾)라고도 한다. 이것은 마음을 한결같이 한 곳에 쏟아서, 마음 너머에 있는 궁극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명상(瞑想)은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고요히 쉬는 것을 일컫는다. 고요히 쉬면서 맑게 깨어 내면을 바라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지관’(止觀) 혹은 묵조’(黙照)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지관은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고() 깨어서 본다()는 뜻이다. 묵조는 고요한 가운데 내면을 비춰본다는 의미이다.

명상의 3요소로는 정좌(正坐), 명심(明心), 무사(無思)가 있다. ‘정좌는 바르게 앉는 것으로 허리를 세우고 어깨에 힘을 뺀 채 안정된 자세로 앉는 것이다. ‘명심은 밝은 마음이다. 명상할 때는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무사는 생각이 없는 상태이다. 생각은 대부분 잡념이다. 잡념이 많을수록 정신이 어두워지지만 반대로 비울수록 명료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상(冥想)이라는 말은 지옥을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 명()은 어두울 명(), 밤명에 뜻을 가진 단어이다. 어두울 명()은 이 세상에서 가장 깜깜한 곳 곧 암흑(暗黑)이라는 뜻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지식이 없을 명, 물귀신 명, 저승명에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일명 지옥 명()으로 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이 지옥(地獄)일 것이다. 지옥은 어리석고 깜깜하고 음침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런데 사찰에 명부전(冥府殿)이 있다. 명부전은 명부(冥府)의 십왕(十王)을 모신 곳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명부는 곧 지옥이며 살아서 온갖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상 예찬논자들은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디아나요가, 즉 명상요가는 몸과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가장 깊은 집중의 상태 혹은 황홀경의 상태(사마디)에 들어서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수련자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라자요가의 마지막 단계인 개체적 자아가 완전히 신에게 흡수되어 하나가 되도록 한다. 특히 불교에서는 모든 요가에 있어서 바탕을 이루는, 시각을 집중하는 기술이 매우 세세하고 탁월한 수준까지 발달되어 있다. 이는 하나의 대상에 오직 한 방향으로집중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궁극적으로 자꾸 고개를 드는 자아를 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3. 명상을 행하는 곳

 

이러한 명상은 종교의 수련법이었다. 그 중에 불교에서는 사마타, 위파사나, 만트라, 기도 등 다양한 명상법이 발달해 있다. 사마타는 의식을 하나의 대상에 모으는 명상법이며 집중명상(Concentrative Meditation)이라고도 부른다. 위파사나는 의식에 떠오르는 것을 떠오르는 대로 자각하는 명상법으로 통찰명상(Mindful Meditation)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사마타와 위파사나는 불교 명상법의 두 축이다. 두 가지를 함께 굴려야 수행의 수레바퀴가 잘 굴러간다고 한다. 이들 수행법은 모두 불교적인 진리인 무아, 무상, 연기법 등을 깨치고 해탈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대승불교의 보살들은 때때로 신과 마찬가지로 예배를 받기는 하지만 사실은 신은 아니다. 보살은 불교에서 명상의 대상이기도 하다. 수련자는 보살의 모습을 세세하게 기억했다가 마음의 눈으로 보는 명상을 한다. 깊이 집중하면 그 대상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깊은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 대승불교의 명상기술은 이 상태에서 더욱 세밀한 단계로 들어간다. 보살의 머리를 떠올리면 마치 진짜 눈으로 보는 것처럼 분명히 보이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보이는 단계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것을 넘어서 더 깊이 들어가면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의 모든 구별이 사라지는 단계가 된다. 이때 수련자는 지금 명상 중이라거나 삼매경에 빠져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게 된다.

도교에서는 불로장생을 위한 단전호흡과 명상법이 발달했다. 도교 수행자들은 고도의 호흡법과 섭생법, 운동법, 명상법을 고안하고 이를 실행해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른 신선이 되고자 했다. 도교의 도인체조인 기공(氣功)이 건강과 미용을 위한 운동법으로 보급돼 있다.

이러한 명상은 힌두교나 불교·도교만이 아니라 라엘교(라엘리언 무브먼트단월드 등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행하고 있다. 여기서 라엘교에 경우에는 명상을 통해 우주인과 접신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4. 명상의 목적

 

명상의 목적에 대해서는 동양 종교가 갖는 특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불교의 경우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적 고통을 제거하는 데 관심을 두고, 신의 섭리와는 상관없는 연기법을 주장하며, 인생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이는 인간 자신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힌두교에서는 업으로 인한 윤회에서 주어지는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에 관심을 두며 인생의 최종 목적을 윤회에서 벗어나 진실로 자유롭게 되는 상태로 본다.

결국, 동양종교에서 행하는 명상이란 생각과 마음을 비움으로써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주어진 고통에서 근본적으로 해방되어 궁극적 경지인 해탈과 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불교 명상은 마음을 고요히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며 수행자의 개념이나 사고에 어떤 형태와 의미를 가져오는 수행 방법이며 초월을 통하여 심오한 마음의 평정 상태인 열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불교와 같이 이러한 류에 명상법은 언제나 그 목표를 해탈, 의식혁명, 정신 진화, 영적 진화 등의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의식혁명은 인간이 곧 신이라는 요가적 자각을 의미한다. 또 정신 진화니 영적 진화라는 용어는 힌두교의 세계관을 현대적 용어로 반영한 것이다. 즉 힌두교의 세계관에서 우주는 크게 세 가지로 형태로 나누어진다. 이에 인간은 윤회를 통해서 점점 더 우월한 형태의 우주에 환생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우주와 합일하여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의 진화론은 오늘날 생물학적 진화론과 결부되어 있다.

 

5. 명상과 묵상의 차이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24:63)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1:8)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

이렇게 우리말 성경에는 묵상이란 단어가 나오지 명상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묵상이란 말과 명상이란 말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혼용해서 쓸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묵상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성도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그의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여 마음에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신앙의 태도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즉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서 묵상이라는 말이 명사로는 강세어 하기온( meditation), 동사로는 하가( meditate)라는 단어와 시아흐’( Sihah, 119:15, 97) 두 가지가 주로 사용되었다.

즉 묵상이란 단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두 가지 중 하나는 명사 하기온( Hagion)이나 동사 하가(Haga)인데 말하다. 신음하다. 곰곰이 생각하다’, 소리’, ‘중얼거림’, ‘묵상’, ‘숙고’, 또는 속삭인다’, ‘깊이 생각하다’, ‘나타내다’, ‘중얼거리다’, ‘계획하다등에 뜻으로 사용 범위가 다양하다. 특히 묵상하다(mediate)’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하가( Haga)에서 왔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의성어이기도 하다. 우리말에 비둘기 울음은 구구라고 표현하지만 히브리어는 비둘기 울음을 하가 하가로 표현한다. 비둘기가 읊조리는 데서 파생한 단어이다. 기본 뜻으로는 곰곰이 생각하다(think upon)’ 또는 반추하다(reflect)’라는 뜻을 가지며, 때로 묵상은 중얼거리거나 읊조리는 것’, 혹은 나지막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묵상에는 자신이 암송하고자 하는 성경 구절을 낮은 목소리로 낭독하는 것도 포함된다.

물론 하가( Haga)라는 단어가 다양한 뜻과 함께 깊이 생각하다라는 의미도 들어있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의미는 읊조리다이다. 읊조린다는 것은 작은 소리를 내면서 읽고 말하며 그것을 반복해서 중얼중얼거리는 행동이다.

두 번째 단어는 동사 시아흐’( Sihah, 119:15, 97). 이것은 숙고하다. 암기하다. 생각하다하는 뜻을 가진다. 단어의 어근을 볼 때 묵상이란 영원한 진리에 대해 깊고 반복적인 숙고를 의미하는 듯하다.

구약에서의 묵상은 그냥 속을 비우는 그런 묵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자면,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나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1) 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였다.

실상 동양적 명상법과 성경적 묵상법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의식 안에서 각인되고 명료화되는 과정이다. 동양적 명상은 무의식 상태, 변형된 의식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께 의식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동양적 명상은 자기 내부에 의식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이고 주인이며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깊은 겸손으로 나타나게 된다. 동양적 명상은 자기는 우주의 중심이고 주인이며 신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도 모르게 더욱 자기중심적으로 만들고 영적으로 교만하게 만든다.

성경적 묵상은 신에게 항복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동양적 명상은 신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성경적 묵상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무의식 안에 있는 상한 마음과 수치, 두려움, 불안을 끄집어내서 의식에 노출시키고 치료한다. 그러나 동양적 명상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 되어있는 상한 마음 수치, 두려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의식상실의 상태 즉, 무의식으로 들어간다. 무의식의 상태에서는 이러한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묵상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평강과 영성의 계발이다. 그러나 동양적 명상은 의식의 조작기술에 근거한 마음의 평화와 정신의 계발이다.

성경적 묵상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서 어두움을 밖으로 몰아낸다. 그러나 동양적 명상은 비우기 때문에 어두움이 그 빈 곳 곧 안으로 들어온다.

명상이란 자신을 비우고 무아지경을 향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인품을 내게 채우는 것을 말한다.

 

6. 글을 마치면서

 

여러 의미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묵상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계속 되풀이해서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특별히 하가라는 단어는 호랑이의 으르렁거림이나 비둘기의 구구하는 소리와 어원이 같다. 즉 묵상이란 계속 되풀이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듯 음미한다.

이에 성경 묵상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라는 여호수아 1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는 교훈을 입으로 되새기며 자신의 일상생활에 연관해서 그 말씀을 생활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고, 따르는 삶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요약해 말하면 명상은 인간이 노력하여 신에 세계로 향하는 발버둥이라고 표현하면 묵상은 내게 임하신 말씀을 되새김질하여 그 주신 의미를 깨달아 순종하고 섬기게 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명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명상을 잘못하면 귀신과 접신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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