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성, 서철원, 정이철의 웨슬리(안) 이단시비에 대하여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열시키지 말고, 더 이상 자신의 무식함을 드러내지 말고, 이제 앞으로는 웨슬리 신학과 웨슬리안 교단들을 이단적이라고 공격하는 하나님께 심판 받을 짓을 지속하지 말고 이제는 멈추&
장기영 박사님의 페이스북에서 허락해주셔서 글을게제합니다.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3307410309&fref=nf 두서가 없지만 이 글을 작성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9월 말까지 올리겠다고 했는데 이제야 올리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웨슬리안 교단들을 이단으로 공격하는 무지하고 악한 일들이 계속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의 웨슬리(안) 이단시비에 대하여 --- I. 들어가는 말 최근 개혁주의(칼빈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를 중심으로 웨슬리를 이단 사상을 가졌거나 이단 사상을 옹호한 것으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이 수 차례 있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나 목회자가 웨슬리를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으로 모는 일은 오래 전부터 흔히 있어왔기에 특별하지 않다. 장로교회 목회자가 교인에게 성결교회, 감리교회는 이단성이 있으니 가서는 안된다고 교육하는 일은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 결과 성결교인, 감리교인이 이사를 가거나 해서 교회를 옮길 때 장로교회에 정착하는 일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루어지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오랜 고민과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사 후 상당 기간 성결교회나 감리교회에 출석해 은혜 받고 만족해 하는데도 등록을 꺼리는 경우 그 이유를 솔직히 물어보면 이전에 다니던 장로교회에서 그렇게 교육받았다고 실토하는 일은 하나의 패턴이 되어있다. 그럼에도 성결교회, 감리교회 목회자가 교인에게 장로교회를 이단적이라고 말하며 가서는 안될 교회로 교육하는 경우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웨슬리를 이단 혹은 이단 옹호자로 비난한 사람의 웨슬리 인식과 비난의 내용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고 분석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 일부를 인용한다. 이 인용문은 외부인에게나 글을 쓴 본인들에게나, 그들의 웨슬리 지식이 충분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그들이 학자로서나 목회자로서 양심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자 이제 그들이 어떤 오해나 부정확한 근거에 기초해 웨슬리를 비난했는지 직접 확인해 보자. 1. 최덕성 박사의 웨슬리 비판 2015년 11월 14일,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제31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칼빈주의 학자 최덕성 은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동일 내용을 그의 저서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에 수록했다 [최덕성,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 제31차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정기논문발표회 자료집, 26-41; 최덕성,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웨슬리는 몬타누스, 펠라기우스, 세르베투스를 이단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 자기와 메소디스트 운동에 이로운 면을 가진 이단 집단에게는 마음을 연다 ... 교리적 주장, 예배 형태, 교회나 회중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든지, 관용정신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의 이단 관용정신과 이단옹호 태도는 자신이 이단자처럼 취급 당하는 데 대한 방어적 동기에서 나온 점을 고려해도 과유불급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혼합주의로 이끄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인의 관심을 성경적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교회의 진리의 민감성을 앗아간다” (최덕성,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 26). “웨슬리는 메소디스트운동의 정당화를 위해 진리를 양보하는 절충주의를 택했다. 그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가지지 않았다. 웨슬리의 신학에는 로마가톨릭, 여호와증인, 소시니우스주의, 이신론, 안식교,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많은 그룹들이 포함될 수 있다. 예수를 앞세우는 여러 부류의 사이비기독교 그룹들도 포함될 수 있다 ... 교회와 신학의 울타리를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벗어난 자들에게까지 넓혀야 하는가? 웨슬리는 그렇다고 답한다 ...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은 교회의 성경적 규범이나 진리성이나 사도들의 전통에서 온 것이 아니다. 자기와 자신이 전개하는 부흥운동에 대한 자기방어적인 변증에서 나왔다 ... 그 결과 ... 편파성, 주관성, 성령주의-열광주의에 빠진다” (최덕성,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 41). 또다른 칼빈주의 학자 조봉근은 논찬에서, 최덕성이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심도 깊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을 잘 분석”한 논문을 썼다고 평가하면서 “찬하”, “감사와 경의” 등의 표현을 사용해 전적 “수용”의 입장을 나타냈다 (조봉근, “최덕성 박사의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에 대한 비판’에 관한 요약과 논찬,” 제31차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정기논문발표회 자료집, 42, 46). 최덕성의 이러한 주장은 웨슬리에 대한 충분하고 균형 있는 연구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최덕성 박사는 충분한 문헌 연구 없이 매우 제한된 자료에 의존해 주장을 펼친다. 그가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 자료는 웨슬리 학자 박창훈 박사의 “존 웨슬리 신학의 급진성: 기존신학과 거리두기”라는 논문이다 [박창훈, “존 웨슬리 신학의 급진성: 기존신학과 거리두기,”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공동학술대회 자료집(2014. 3. 22). 이 논문은 2014년 3월 22일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의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 후, 곧 이어 출판된 박창훈, 『존 웨슬리, 사회비평으로 읽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4), 237-257에도 수록되었다]. 최덕성 박사는 박창훈 박사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음에도, 총 120개의 각주 중 그 출처를 밝힌 곳은 단 한 차례(각주70번)이며, 그것도 단 1페이지(227페이지)만 참고한 것처럼 썼다. 이로써 문헌연구의 대부분을 최덕성 박사 자신이 수행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학자로서의 기본적 양심에 어긋난다는 비난과 심각한 표절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매우 아이러니한 점은, 최덕성이 의존한 박창훈 박사는 웨슬리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이다. 즉, 웨슬리는 기존의 정통신학에서 성경적 기독교를 왜곡하는 요소를 의연히 변화시키려는 성경적 개혁성을 가졌으며, 교회사의 다양한 기독교 전통이 지닌 참된 기독교의 요소를 종합하는 성경적 포괄성을 가진 인물이다. 또 웨슬리의 관용정신은 “무관심이나 절충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원칙과 진리관”에서 나온 신앙적 용기,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끝없는 애정과 친절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최덕성은 이런 자료를 대부분 사용하면서 그 결론만 부정적으로 바꾸어 버린다. 웨슬리의 관용정신이라는 말을 “이단 관용정신”이라는 말로 변질시키고, 웨슬리의 성경적 포괄성을 기독교의 기본진리도 양보하고 이단을 옹호하는 이단성으로 변질시킨다. 이러한 목적 하에 최덕성은 웨슬리를 루터와 루터파 경건주의, 영국국교회와 가톨릭과만 연결시키면서 그의 개혁주의 및 청교도적 뿌리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웨슬리는 친가와 외가 모두 여러 대에 걸쳐 청교도 목회자들로서 가톨릭적 특성을 지닌 영국국교회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은 개혁주의적 뿌리의 집안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모든 웨슬리 전기들이 다루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웨슬리를 비판하려는 의도에 따라 웨슬리와 개혁주의 연관성을 제거하려 한 의도가 드러난다. 또 웨슬리가 영국국교회 교회들로부터 강단설교를 금지당한 원인은 모라비안들로부터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정수를 배운 후 이신칭의를 설교했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왜곡해 웨슬리의 “감정주의, 열정주의 특성” 및 영국국교회에 대한 “위협적” 특성 때문으로 묘사한 것 역시, 최덕성의 지식 부족 때문이 아니라면, 학자적 양심의 부족 때문으로 보인다. 최덕성은 웨슬리를 이단 옹호자로 몰기 위해 몬타누스, 펠라기우스, 세르베투스, 재세례파가 어떤 잘못된 주장을 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방법을 사용해, 마치 웨슬리가 그런 이단적 주장 모두를 수용하고 옹호한 것처럼 만드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독자들로 하여금 웨슬리를 마녀사냥하자는 최덕성의 논리에 신앙적 충성심을 가지고 동조하게 만드려는 것이다. 웨슬리가 그들의 주장 전체에 동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 시대의 세속화되고 타락한 교회에 그들이 어떤 경종을 울렸는지에 대해 일부 긍정적인 요소도 있음을 언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덕성은 마치 웨슬리가 그들의 잘못된 내용까지 추종한 듯, 기승전 ”웨슬리는 이단 옹호자”라는 논리로 마무리 한다. 최덕성과 관련하여 한 가지의 에피소드만 더 소개하자면, 최덕성은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을 발표하기 단 10일 전인 2015년 11월 4에 <크리스천투데이>의 "최덕성 칼럼"에서 아직 칼빈주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진행중인 세르베투스의 화형에서 칼빈의 역할에 관해 “칼빈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세르베투스 사형에 대한 칼빈의 책임론에 대한 주장은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교회의 거룩성을 무너뜨리는 맹독을 지닌 터무니 없는 내용”이라고 하면서, 칼빈에 대한 악평을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는 죄로 언급한다. “명예훼손은 제6계명과 제9계명 위반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 명예는 산 자처럼 보호받아야 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단지 개혁주의 전통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회 전체가 신세를 진 칼빈을 교파주의적 편협성으로 비난하는 것은 “기독인다운 처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 http://reformanda.co.kr/xe/index.php… ). 그런 말을 한 지 겨우 10일 후에 자기 자신은 웨슬리를 이단 옹호자로 모는 “기독인다운 처신”이 아닌 행동을 자행하다니, 그의 이성적 판단력이 마비된 것인지, 아니면 양심이 마비된 것인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이다. 2. 서철원 박사의 웨슬리 비판
최근 웨슬리를 이단적이라고 비난한 정이철 목사가, 자신은 웨슬리의 글은 직접 읽어보지는못했으나 본 적이 없으나 서철원 박사의 가르침에 의존해 그렇게 판단한다고 말하면서 서철원 박사의 글을 인용했다. 그 내용은 정이철 목사가 웹사이트에서 일단 삭제한 상황이지만 이미 유포되어 퍼질대로 퍼져있는 상황이라 그대로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요한 웨슬리는 믿음으로 칭의 받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선행이라고 합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칭의 받으려면 먼저 회개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고 믿기로 작정하면 성령이 중생시키신다고 말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 믿기로 작정하면 중생의 역사가 나타는데 그와 동시에 사랑의 선행을 해서 성화를 이루어야합니다. 성화는 구원은혜의 도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행은혜 곧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진 일반은혜와 자유의지가 협력하여 성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완전성화’를 이루면 그 성화에 근거해서 칭의를 받는다고 합니다. … 웨슬리는 이신칭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근본진리를 전적을 부정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하거나 혼합하고 변경시키면 이단이지요. 이신칭의 교리가 종교개혁교회의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고 혼합하면 이단임이 분명합니다. 웨슬리의 신학은 이단이라고 단정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훌륭할지라도 신학은 종교개혁의 진리가 아니어서 구원은혜의 역사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웨슬리는 교리와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와 완전히 동일합니다 … 웨슬리의 가르침에 대해 개혁파 신학자들이 그의 완전성화 주장만 부정하였지, 이단으로는 정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약점이었습니다.” 웨슬리에 대한 서철원의 지식은 부실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서철원이 학생으로서 교회사나 조직신학 시간에 웨슬리에 대한 시험을 치렀다면, 서철원은 교수가 관대하면 D, 정확하면 F 학점을 받았을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과 개신교 내 타 신학 전통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이 글을 과연 서철원이 쓴 글이라고 믿어도 좋을지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웨슬리에 대한 상식이나 학자로서의 양심이 없이 쓴 글에 대해 굳이 응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지만, 혹시 서철원의 글을 읽고 오해할 사람이 있을 수 있어, 서철원과 비슷하게 웨슬리를 오해한 Dr. Trinklein에 대한 논평의 글을 링크로 남긴다(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439498059503761&id=100003307410309 ) 3. 정이철 목사의 웨슬리 비판 정이철은 자신이 운영하는 바른믿음이라는 웹사이트에 지난 2017년 5월부터 “웨슬리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요?”(5월 28일), “과연 웨슬리에게는 신학적 이단성이 없었던 것일까?”(9월 5일,) “서철원 박사, 웨슬리 신학을 이단으로 단정해도 무리 없습니다”(9월 7일), “정말 웨슬리는 온전한 복음의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9월 7일), “내가 웨슬리에 대해 배우고 들었던 것이 전부 사실이었다”(9월 8일) 등 총 5건 이상의 글을 올려 웨슬리를 이단으로 주장했다. 그의 웨슬리 비판에서 매우 부적절한 점은 그 스스로가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웨슬리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9월 8일 “내가 웨슬리에 대해 배우고 들었던 것이 전부 사실이었다”에서)라고 말하듯, 그가 웨슬리의 글을 스스로 읽고 확인하는 과정조차 거치지 않고, 웨슬리를 비판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은, 소위 “카더라” 통신에 의존해 세계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파인 범웨슬리안 교단 모두를 이단적 사상을 가르치는 것으로 선언한 것이다. 정이철의 주장은 소문과 추측에 근거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 인용할 가치는 없으나, 그가 지금까지 “웨슬리에 대해 배우고 들은 것”이 반영된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자, 목회자들이 신학생이나 목회자, 신자들에게 웨슬리를 어떤 괴이한 인물로 가르쳐왔는지를 엿볼 내용이 있을 것이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웨슬리는 타락 후에도 스스로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당부분 온전한 상태라고 가르쳤습니다 …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음을 믿을 기회를 주었다는 면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나,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서 구원받는다고 하니, 결국 믿기로 결정한 그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 웨슬리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롭다하심’(칭의)을 얻는 것과 그 이후의 ‘그리스도를 닮아감’(성화)에 대해서 매우 비성경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롭다하심에 대해서 바른 성경적 이해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결국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믿음의 선행을 보이지 못하면 다시 구원을 잃고 지옥에 갈수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웨슬리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5월 28일). “웨슬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더불어 인간의 지속적인 믿음의 행위와 삶의 열매가 영원한 칭의와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이다 … 웨슬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삶의 변화, 즉 믿음의 선한 열매를 칭의 유지와 구원 지속의 조건으로 가르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주장과 이론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그 저주스러운 이단과 무엇이, 어떤 점에서 다를까? 아무리 생각해도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이단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 그리고 웨슬리가 가르친 ‘완전성화’에 대해서 변명과 해석이 구구한데, 죄에 대한 유혹이 사라진다나 ...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 완전성화라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의 비성경적인 ‘완전성화’ 개념이 결국 홋날의 거짓 방언과 거짓 성령세례 운동을 발생하게 만드는 처음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대체 완전성화라는 개념을 성경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웨슬리에게는 신학적 이단성이 없었던 것일까?”, 9월 5일). “나는 이제까지 요한 웨슬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는 말을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 만일 요한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외에 우리가 선한 행위나 무엇을 더해야 구원을 얻고 구원이 지속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면, 그는 이제라도 분명히 이단으로 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 요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우리의 올바른 행위가 더해져야 칭의, 구원, 칭의유지, 구원유지가 가능한다고 가르쳤으므로 완전한 이단이었다 …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에 인간의 좋은 행위를 더하여 구원얻으려는 자들을 '개'라고 저주하였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 3:2) 여기에 요한 웨슬리가 해당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이런 이단을 추종하는 어리석은 감리교 목사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의 설교를 듣는 감리교 신자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생각하니 ... 이를 어찌할꼬! 웨슬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하는 말을 하면 자기 얼굴과 이름을 가리고 미친사람처럼 덤비는 감리교 목사들의 모습은 내가 지금까지 싸우고 물리치기 위해 힘썼던 다른 이단들과 속성이 너무 비슷했다.” 정이철의 소문과 추측에 근거한 웨슬리 비난의 부당성에 대한 언급은 이전에 올린 글을 링크함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442130529240514&id=100003307410309 )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칼빈주의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공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웨슬리와 웨슬리안을 이단적이라고 비난해온 사실에 대해, 그들이 어떤 사고방식 속에서 웨슬리와 웨슬리안을 비난해 왔는지를 살펴보자.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사고방식과 논리를 점검해 보자. II. 역사적 배경: 교회사에서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구원론 초기 기독교는 2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의 존립을 위해 몇 가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었다. 첫째로, 기독교의 기둥이자 최고의 권위자였던 사도들이 순교나 노화로 죽어가자 권위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앞으로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 감독 중심으로 교회 조직 정비해 감독이 사도적 가르침을 계승하도록 했다. (2) 신경 속에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진술함으로 (180년 로마신경 – 사도신경의 원시형태)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암기하도록 했다. (3) 신약 정경을 형성했다 [아다나시우스 (295-373) 의 편지에 현대 정경 목록과 일치하는 신약성경목록 기록되어 있음]. 둘째로, 박해와 순교 속에서 교회 생존의 문제였다. 그 중에서도 249~313년 약 60년간, 특히 249~260년 사이 황제 데오도시우스와 발레리안의 박해와 303-309년 사이 황제 디오클레티안의 박해는 극심했다. 수많은 배교자들이 생겨났고 교회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음에도, 참된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빛을 발하는 시기였다. 셋째로, 4세기 이후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 박해는 끝나고 기독교 황제와 주교들의 시대가 열렸으나, 박해 시대 동안 교회 내부에 잠재되어 있었던 각종 이단 문제가 불거졌다. 그동안 박해 받던 소종파에서 그리스 로마 제국의 지배적 종교로 부상한 기독교는 교회 전체의 공의회를 소집해 교리 문제를 정립함으로 이단에 대처해 나갔고, 교회의 교리적 일치가 제국의 통합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 황제들은 공의회 소집을 통한 이단 대처를 적극 지원했다. 넷째로, 교회의 공의회를 통한 교리 정립과 이단 대처는 미완의 과제로 남겨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더 이상 교리 정립과 이단 대처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교황이 세속군주화 되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치세력화 되자 교회는 교리 정립이나 이단 대처보다 세속 권력 다툼과 부와 쾌락의 탐닉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의 세속화가 심각해지기 전에 이미 정립된 교리와 아직 정립되지 않은 교리가 분명히 나누어진다. 예를 들어, 교회의 세속화 이전에 비교적 잘 정립된 교리는 삼위일체론, 교회론, 인간론 등이다 그러나 구원론(칭의론) 해결을 위해 모인 가톨릭 공의회는, 펠라기우스를 정죄한 카르타고 공의회(418년), 어거스틴의 교리를 채택하면서도 이중예정론 같은 극단적 교리를 거부한 제2차 오렌지 공의회(529년)를 제외하면, 종교개혁 이후 모인 1545년 트리엔트 종교회의가 유일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죄인이 어떤 방법으로 구원받는지에 대한 지극히 중요한 교리 정립을 등한시 한 채 세속 권력 투쟁과 부와 쾌락 탐닉으로 중세 천 년을 흘려보낸 것이다. 종교개혁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요인은 중세 가톨릭 교회 자체에 내재해 있었다. 다섯째, 교회사에서 구원론을 논의한 매우 중요한 시기는 5세기와 16세기로, 이 두 시기는 펠라기우스주의 극단이 일어나자,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을 강조하는 반대편 극단 어거스틴 신학으로 이단에 대처한 시기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가 진압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론이 승리를 거둔 후 5세기 교회와 16세기 루터란 교회는 그 신학을 다시금 성경적 균형으로 되돌리기 위해 성실한 노력을 기울인 데 비해, 칼빈주의자들은 펠라기우스주의를 저지하고 심각한 논쟁을 종식시킨 후오히려 맹렬한 논쟁의 시기보다 그 신학적 극단성을 더 강화시켰다. 극렬한 구원론 논쟁 후 5세기 교회, 루터란, 칼빈주의자의 신학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경적 구원론을 심각히 왜곡한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이 강력한 위세를 떨친 5세기 기독교는,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한 어거스틴 신학으로 펠라기우스주의를 성공적으로 저지했으나, 논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어거스틴 신학이 가진 또다른 극단적 요소들 (이중예정론이나 노예의지론 등) 역시 거부했다. (2) 중세 가톨릭 신학이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빠졌을 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어거스틴 신학을 다시 활용해 중세 가톨릭주의의 인간의 행위 중심 구원론을 깨뜨렸다. 루터는 어거스틴이 만든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 등의 극단적 논리를 무기 삼아 반대편 극단을 깨뜨린 것이다. 하지만 루터 사후 루터란 교회는 필립 멜랑히톤을 중심으로 루터 신학의 극단적 요소인 이중예정론이나 노예의지론을 완화시킴으로 루터란 전통을 성경적 균형으로 되돌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현재 루터란 교회는 루터 신학의 극단적 요소를 제거한 온건한 루터 신학 위에 서 있다. (3) 루터보다 26년 후에 태어난 존 칼빈은 루터를 뒤이어 종교개혁 신학과 종교개혁 운동을 더욱 발전시켰다. 칼빈 학자 프랑소아 방델의 표현대로 칼빈은 루터의 수제자로서 루터 신학의 정수를 온전히 섭렵해 자신의 신학의 자양분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루터처럼 이중예정론, 노예의지론 등 어거스틴 신학의 극단적 요소를 로마 가톨릭주의의 펠라기우스적 극단을 무너뜨리는 무기로 삼았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주의와 혈전을 벌였던 5세기 교회나 16세기 루터란 교회가 이후에는 어거스틴과 루터 신학의 극단성을 완화시킨 것과 달리, 칼빈 사후 칼빈주의자들은 테오도르 베자를 중심으로 칼빈 신학의 극단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칼빈주의 신학을 형성해 나갔다. 그 영향 하에 칼빈 신학을 자신의 신학적 토대로 표방하는 대부분의 장로교 신학자, 목회자들이 실제로는 칼빈 신학의 극단성을 완화시킨 온건한 칼빈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자신을 칼빈주의 주류로 착각하는 소수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개신교 이외의 기독교 전통을 모두 이단이나 이교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신교 내에서도 극단적 칼빈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교단과 신학은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으로 공격하는 극단적 성향을 나타낸다.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은 교회사에서 칼빈주의 전통, 그 중에서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온건한 칼빈주의 전통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극소수에 불과한 극단적 칼빈주의자에 속한다. 그들은 개신교 내의 타 신학 전통 뿐만 아니라, 온건한 칼빈주의자들 역시 이단적이라며 공격하는 신학적 극단성을 가진 신학적 소수자들이다. III. 누가 이단인가? 이단 문제 대두와 초기 기독교의 이단 판별법 서로마제국 멸망 후 가톨릭 교황이 세속권력과 권력 투쟁에 빠지게 되어 교회의 당연한 직무로서 성경적 교리를 정립해야 할 의무를 등한시한 것이 사실이나, 그 이전까지의 초기 기독교는 각 시대마다 강력하게 대두된 각종 이단을 저지하고 성경적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 매우 성실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초기 기독교는 신약 시대로부터 전해져온 사도적 가르침과 각종 이단들이 새로 만들어낸 교리 사이를 구분지을 수 있는 강력한 이단 판별법을 갖추게 되었다. 현대 기독교에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주는 초기 기독교의 이단 판별법을 살펴보자. 1. 영지주의 이단의 “비밀지식” vs. 이레나이우스의 “전통의 단일원천설”(single-source theory) 이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전히 살아 활동하던 시기부터 교회에 침투해 들어와 거짓 교리와 죄악된 삶을 심어놓았고, 2세기에는 특히 영지주의 이단이 큰 문제가 되었다. 영지주의 저술가들은, 구원은 비의(비밀지식)로써 가능한데, 비밀 지식은 마치 우주적 암호 같은 형태로 되어있고, 이 은밀한 지식이 사도들에게 전수되어 성경 안에 숨겨져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다고 누구나 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특별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자들이 그 지식을 얻을 수 있기에, 영지주의의 은밀한 전통에 입문해 비밀 지식을 얻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논리에 대항하는 교회의 대응법은 사도적 전통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 교회는 사도 시대에까지 소급되는 성경 본문에 대한 권위적 해석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도 성경을 자의적으로, 임의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회의 연속된 역사의 맥락 안에서, 즉 전통을 따라 해석해야 하는데, 여기서 “전통”이란 “신앙 공동체 안에서 경전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서, 이 방법은 오직 하나의 원천인 사도들에게서 직접 유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통의 단일 원천설(single-source theory)로 불린다. 영지주의 이단을 반박하고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전통의 단일 원천설을 강조한 예는 리용의 이레나이우스(130-200)의 『이단을 반박함』(AD180)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에게서 신앙의 지도를 받았고, 사도들에게서 유래한 성경해석 방법을 전수받은 교부로서, 사도들이 전해준 성경해석 방법은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전통임을 강조했다. 『이단을 반박함』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단들은 성경에 의해 반박을 받으면, 마치 성경이 옳지 않거나 권위를 갖지 못한 것처럼 성경 자체를 비난한다. 성경은 다양한 진술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전통을 알지 못하는 그들이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글을 통해 전달된 것이 아니라 ‘생생한 음성’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자는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 이미 알려져온 사도적 전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사도들이 지명한 주교들과 오늘까지 내려온 계승자들의 수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분들은 저 이단들이 상상하는 것 같은 내용을 전혀 가르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만약 사도들이,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 같이 사사로이 그리고 은밀히 완전한 자들에게 가르친 숨겨진 비밀들을 알고 있었다면, 사도들은 그 비밀들을 자신들이 교회를 맡긴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후임자들이자 자신들의 권위적 직분을 물려준 이들이 완전하고 흠이 없기를 바랬을 것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증거가 있으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진리를 다른 곳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사도들은 이 진리를 교회라는 보고 속에 온전히 축적해 놓아서, 누구나 원하는 자는 교회를 통해 이 생명수를 길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문이다. 이 문을 통하지 않는 자는 강도요 도적이다.” 2. 발렌티누스, 마르키온, 프락세아스, 몬타누스 vs. 테르툴리아누스 이레나이우스보다 후대의 인물로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 뿐만 아니라 마르키온, 프락세아스, 몬타누스 등의 이단에 대항해 기독교 교리의 사도적 계승과 전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또다른 교부로 테르툴리아누스(약160-약225)를 들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를 사도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사도적 교회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위를 이어나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교를 위해 사도들을 파송하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명하신 설교자들 외에는 누구도 영접해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신 것은 사도들 자신의 설교의 생생한 음성과 그에 따른 편지들로 설립한 교회들에 의해서만 확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옳다면 사도적 교회와 일치하는 모든 교리, 신앙의 자료요 근원인 교리는 진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사도들에게서, 그리스도에게서,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을 의심할 나위 없이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단들 중 누가 감히 자기들의 기원을 사도시대까지 소급하려 하고, 그 결과 자기들이 사도들 밑에 있었다는 이유를 대면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사도들에게서 전수받은 것이라며 그럴듯한 구실을 대려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너희 교회의 근거를 제시하라. 너희 주교의 위계를 제시하라. 처음부터 시작한 승계의 역사를 제시하라. 그리하여 너희의 첫 번째 주교가 선임자로서 사도든, 혹은 사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준사도적 인물임을 입증하라.” 3. 5세기까지의 모든 이단 vs. “빈켄티우스 카논” (Vincentian Canon) 이레나이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보다 수세기 후 프랑스 레랑 섬에서 활동한 프랑스 교부 신학자 빈켄티우스(~ 445)는 이레나이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사도적 계승과 전통을 강조하면서, 사도적 계승에서 벗어난 이단을 판단할 수 있는 더 분명한 척도를 제시했다. 사도적 기독교 교리는 “언제나 있어왔고, 어느 지역의 교회든 공통적으로 믿으며, 누구나 믿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삼중 척도는 “빈켄티우스 카논”(Vincentian Canon)으로 불린다. 다시 말해 참된 기독교 교리의 삼중 척도는 (1) 고대성 (사도 시대로부터 믿어온 교리여야 함), (2) 보편성 (어느 지역의 교회든 동일하게 믿는 것이어야 함), (3) 일치성 (모든 신자가 인정하고 믿어온 내용이어야 함)이라는 세 기준이다. 빈켄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락한 이단들의 오류에서 보편적 신앙의 진리를 구별해내는 데 필요한, 확고하고도 일반적인 원리는 어떻게 확립할 수 있는가? … 성경은 그 심오함 때문에 보편적 의미로 수용되지는 않는다. 동일한 성경의 진술이 이 사람, 저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되며, 급기야 사람 수만큼이나 서로 다른 많은 해석이 존재하는 듯하다 … 그러므로 각양각색의 오류 때문에 누군가는 예언자와 사도들을 해석하기 위한 척도를, 공교회(the Catholic church)의 척도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공교회는, 우리가 언제나 어디서나 만민이 믿어온 진리를 견지한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빈켄티우스는 모든 사람의 성경 해석은 제각각 다르고, 심지어 이단들까지도 성경에 호소하므로 단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라며 성경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척도가 필요한데, 이는 사도 시대로부터 전해내려온 신앙의 내용, 모든 지역의 교회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신앙의 내용, 그리고 모든 신자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빈켄티우스가 참된 기독교 교리의 삼중척도를 제시한 『콤모니토리』(Commonitory: 정통신앙 교훈집)는 이단판별법에 관한 가장 중요한 원리들을 담고 있었기에, 출판 이후 150회 이상 발간되고, 라틴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대단히 큰 인기를 누려왔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는 전통의 단일 원천설에 의거해 성경을 사도 시대에까지 이어지는 살아있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해석하는 방법이, 이단을 구별해낼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를 바르게 연구하고 보존하는 데 필수불가결 하다는 인식에서 보편적 일치를 이루었다. IV. 초기 기독교의 이단 제어를 도왔음에도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었던 신학적 창작물, 어거스틴의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 1. 빈켄티우스의 판단 초기 기독교의 이단판별의 원리를 가장 잘 압축해낸 빈켄티우스는 “빈켄티우스 카논”이라는 삼중 척도에 따라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일어난 이단들 즉 펠라기우스, 발렌티누스, 도나투스, 포티누스, 아폴리나리스, 네스토리우스, 오리게네스, 몬타누스 등의 이단성을 잘 설명해냈다. 동시에 빈켄티우스는 초기 기독교가 펠라기우스주의 이단을 제어한 공로를 높이 사 이단으로 판정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약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가 펠라기우스 논쟁 시기에 새롭게 만들어진 교리가 어거스틴이 주장한 이중예정론, 노예의지론과 같은 극단적 교리임을 밝혀냈다. 빈켄티우스는 사도 시대와 교부 시대의 신학의 발전과정 전체를 면밀히 연구한 끝에,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은 펠라기우스주의 이단과의 논쟁 끝에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창작물이지, 사도들로부터 교부들을 거쳐 전해져 내려온 교리가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빈켄티우스 카논의 삼중 척도에 비추어보면, 어거스틴의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은 사도들로부터 전해지지도 않았고, 모든 지역의 교회가 믿어온 교리도 아니며, 모든 성도들이 다같이 믿는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빈켄티우스는 『콤모니토리』에서 어거스틴의 이름을 거론해 그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으나,어거스틴과 그의 추종자들을 “혁신자들”로 규정하면서 어거스틴이 새로 만들어낸 극단적 교리인 이중예정과 노예의지론이 사도들과 다른 모든 교부들의 신학의 입장을 벗어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빈켄티우스는 “아프리카의 감독”(어거스틴을 지칭)이 가르친 이중예정과 노예의지론은 “항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 의해” 가르쳐지지 않았기에, 참된 기독교 교리가 아닌 혁신에 해당되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교리임을 천명했다 (출처: 기독교고전총서9, 중세 초기 신학, 31). 교회사가 필립 샤프는 자신의 『교회사전집』에서 빈켄티우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많은 교부들이 어거스틴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여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신학을 새로운 창작물로 여겨 배격했음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 밝힌다 (출처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3:861-865). 2. 오렌지 공의회(529년)의 판단 어거스틴과의 논쟁의 결과로 펠라기우스주의가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고,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재차 정죄를 받았는데도, 계속적으로 뿌리 뽑히지 않고 반(半) 펠라기우스주의 형태로 존속하면서 어거스틴주의와 충돌을 일으키자, 카르타고 공의회 이후 110년이 넘게 지난 6세기, 529년 오랑주 종교회의는 반(半) 펠라기우스주의를 다시 한번 정죄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초기 기독교는 어거스틴이 가르친 이중예정론이나 불가항력적 은총과 같은 요소들도 역시 사도 시대로부터 교부들에게 전해진 기독교 교리에 포함될 수 없는 어거스틴의 신학적 창작물로 여겨 그 교리들을 성경적이고 사도적인 교리들로 채택하기를 거부했다. 3. 아르미니우스(1560-1609)의 판단 제임스 아르미니우스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로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칼빈의 계승자 테오도르 베자의 문하생이 된, 탁월한 칼빈주의 학자이자 베자의 수제자였다. 그러나 코른헤르트라는 성경에 해박한 평신도가 나타나 칼빈의 예정론이 성경적이지 않음을 주장하자, 당시 칼빈주의자들이 가장 훌륭한 칼빈주의 학자로 인정한 아르미니우스에게 코른헤르트 논박의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는 예정론에 대한 반대를 논박하기 위해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을 연구하던 중, 원래의 의도와 달리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에는 칼빈과 베자가 가르친 것과 같은 이중예정이 결코 나타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자, 칼빈이 가르친 하나님의 은총 중심의 구원론은 찬성하되, 칼빈의 극단적 이중예정론은 오히려 반대하게 되었다. 4.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1483-1546) 와 존 칼빈 (1509-1564) 의 판단 어거스틴이 주장한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이 어거스틴 이전의 모든 사도와 교부들이 가르쳤거나 전수받은 적이 없는 새로운 창작물이라는 빈켄티우스 및 초기 기독교 교부들, 그리고 오렌지 공의회와 아르미니우스의 판단은 옳은가? 그들은 스스로가 이중예정론에 반대했기에 어거스틴의 신학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어거스틴에 대해 지나친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런 의심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그렇기에 어거스틴 신학의 극단성에 대한 반대자의 판단만 참고할 것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신학을 계승해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을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 무기로 삼아 로마 가톨릭에 대항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의 판단 역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루터와 칼빈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빠진 로마 가톨릭 교회를 대항해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어거스틴의 반(反) 펠라기우스 신학에 기초했음은 잘 알려져있다 [Wolfgang A. Bienert, “The Patristic Background of Luther's Theology,” Lutheran Quarterly 9 (1995), 263-79; S.J. Han, “An Investigation into Calvin's Use of Augustine.” Acta Theologica Supplementum Vol. 10 (2008), 70–83 등 참고]. 그들은 어거스틴의 원죄론과 노예의지론, 이중예정론을 그대로 이어받고 강화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르친 초기 기독교의 모든 교부들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거스틴 자신이 인간의 자유의지나 구원에서 하나님과의 협력을 말할 때는 어거스틴을 향해서조차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 수도회 수도사였으며 어거스틴을 따라 원죄와 인간의 전적타락, 노예의지론과 이중예정론 등을 종교개혁 신학의 뼈대로 삼은 루터는 어거스틴과 다른 모든 교부 사이를 분명히 구분지었다. 루터는 『창세기 강해』에서 “교부들이 자유의지에 대한 위험한 주장을 함으로써 이루려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들의 글을 읽으려면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며 어거스틴 외의 모든 교부들이 가르친 자유의지론을 거부했다. 심지어 루터는 “당신 없이 당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신 없이 당신을 구원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말로 구원을 위한 인간의 역할도 있다는 어거스틴의 온건한 주장에도 반대해, “이런 주장에서 도출되는 것은, 자유의지의 협력이 구원을 위해 선행적이고 효과적인 원인이 된다는 결론이다”라며 어거스틴의 주장에도 반대를 표했다 (Luther’s Works 1:61). 그는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여러분은 … 고대 신학자에게서 율법과 복음의 올바른 구별에 관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 수세기 동안 모든 학교와 교회는 이에 대해 현저히 침묵을 지켜왔다”고 주장함으로 교부들 전체를 거부한 반면 “어거스틴은 이에 대해 약간 가르치고 표현했다”는 말로 다른 모든 교부들과 구분지었고, 복음을 가르치는 일에서 자신이 어거스틴보다 뛰어남을 주장했다 (Luther’s Works 26:313). 루터는 자신의 회심 경험인 “탑의 체험”을 기술한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에서도, 어거스틴은 비록 하나님의 의를 신앙 안에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선물로 바르게 이해했으나 이를 “불완전하게” 설명해 성경의 진리를 “명쾌하게” 만들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Luther’s Wokrs 34:337). 『탁상담화』에서는 이보다 더 나아가 “바울을 이해하게 된 후 나는 교회의 어떤 신학자도 좋게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내게 조금도 가치가 없다. 처음에 나는 어거스틴을 단지 읽는 정도가 아니라 깊이 탐독했다. 그러나 바울을 이해하는 눈이 뜨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후에는 더 이상 어거스틴을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Luther’s Works 54:49). 이처럼 루터는 초기 기독교 교부들 중 노예의지를 가르친 단 한 사람 어거스틴과 자유의지를 가르친 다른 모든 교부 사이를 구분해 어거스틴을 지지하고 다른 모든 교부들에 반대하면서도, 자신의 신학이 어거스틴 신학보다 더 급진적임을 스스로 드러냈다. 루터의 판단에 따르더라도,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은, 다른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누구도 가르치지 않은, 어거스틴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은 입증된다. 칼빈은 루터의 가장 충실한 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의 제자이기도 했다. “칼빈을 이해하려면 루터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루터를 이해하는 것은 칼빈을 배경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모두 어거스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라고 한 아더 쿠스탕스의 말은 칼빈 신학의 원천과 정수를 잘 압축했다 [아더 C. 쿠스탕스 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칼빈의 교리신학』 (서울: 기독교문화협회, 1986), 79]. 칼빈은 어거스틴, 루터를 따라 노예의지론, 이중예정론, 불가항력적 은혜 등을 가르쳤다. 루터처럼 칼빈 역시 “교부들은 인간의 의지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는데,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대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 … 혼란한 상태였다”고 주장함으로, 고대 교부들 중 노예의지를 가르친 유일한 사람 어거스틴과 (기독교강요 II. 2. 8), 자유의지를 가르친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대 교부들” (기독교강요 II. 2. 4),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교회 저술가들” (기독교강요 II. 2. 9) 사이를 명확히 구분했다. 칼빈은 자신의 논문 『예정에 관하여』(Concerning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에서 암브로우스를 1회 인용한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교부도 인용하지 않고 오직 어거스틴만을 96회 인용하면서 “어거스틴과 내 생각은 너무나 비슷하기에, 만약 내가 예정에 관한 신앙고백서를 작성한다면 나는 매우 기쁘게 어거스틴의 글들에서 많은 내용을 인용할 것이다”(CO 8, 266)라는 말로 자신의 예정론이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바탕을 두었음을 분명히 표현했다. 칼빈은 성경을 주석할 때는 크리소스톰 등 많은 교부들을 인용해 종교개혁 신학이 자신의 창작물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노예의지론을 주장한 『의지의 속박과 자유』(The Bondage and Liberation of the Will), 이중예정론을 주장한 『예정에 관하여』, 그 이외의 다양한 반(反)펠라기우스주의 저작물 등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를 설명할 때는 언제나 오직 어거스틴만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양면성을 나타냈다 [S.J. Han, “An Investigation into Calvin's Use of Augustine.” Acta Theologica Supplementum Vol. 10 (2008), 70–83]. 칼빈 역시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 등의 극단적 요소들이 어거스틴의 창작해낸 교리임을 입증한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신학적 유사성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많은 사례를 들어 설명할 수 있으나 이 정도의 설명으로 그치고자 한다. 단지 지금까지 언급한 사실들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즉, 성경과 교부 시대 전체를 면밀히 연구한 후 노예의지론, 이중예정론, 불가항력적 은총론 등을 가르친 사람은 오직 어거스틴 뿐이었으며, 사도들, 그리고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교부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했고, 이중예정론을 결코 가르치지 않았으며,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이 아닌 가항력적 은총(resistible grace) 또는 인간이 응답가능한 은총(responsible grace)를 가르쳤다고 주장한 레랑의 빈켄티우스, 오렌지 공의회, 제임스 아르미니우스, 존 웨슬리 등의 판단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옳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점은 어거스틴이 창작해서 만들어낸 극단적 교리에 반대한 그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의 교리를 받아들여 로마 가톨릭의 펠라기우스주의를 깨뜨리기 위한 종교개혁의 무기로 활용한 루터, 칼빈의 주장에 의해서도 동일하게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양대 흐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교리들(노예의지론, 이중예정론, 불가항력적 은총론)을 창작해 펠라기우스주의 극단과 싸웠던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한 팀을 이루고, 사도들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전수받은 속사도 교부들과 어거스틴을 제외한 모든 고대 교부들, 오렌지 공의회를 포함해 모든 초기 기독교 교회들, 제임스 아르미니우스와 존 웨슬리가 또다른 한 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기독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를 저지해낸 지극히 중요한 공로를 인정해 초기 기독교는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극단적 교리를 이단적이라고 정죄하지는 않았고, 또 개신교회 역시 펠라기우스주의에 빠진 로마 가톨릭주의에서 교회를 구해낸 공로를 인정해 루터, 칼빈의 극단적 교리를 이단적이라고 정죄하지는 았았지만,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 등의 교리가 교부시대 전체를 통틀어 누구도 주장하지 않았던 신학적 창작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V. 신학 체계 비교: 어거스틴, 루터, 칼빈 vs 다른 모든 교부, 빈켄티우스, 오렌지공의회, 아르미니우스, 웨슬리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신학체계에서 인간의 전적무능과 노예의지론에 대한 주장은 (인간론), 하나님께서 구원의 모든 것을 결정하시며, 그 결정 방법은 인류의 소수는 구원으로, 그 이외의 대다수는 멸망으로 결정하시는 이중예정을 통해서라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신론). 그리고 이는 또다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미 결정해놓은 구원 문제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고, 믿음이든 선행이든 단지 하나님의 예정을 성취하는 과정만이 절대적, 필연적, 배타적으로 일어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구원론). 그러나 칼빈 신학자 에밀 두메르그가 솔직히 인정한 것처럼, 이러한 신학 체계에는 그 내부적으로 “모순들”, “이율배반들”, “상반대립들”이 존재한다 [에밀 두메르그 저, 이오갑 역, 『칼빈 사상의 성격과 구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70-74]. 비록 에밀 두메그르는 이를 “표면상의 모순”일 뿐이라고 설명하면서 서로 모순되어 보임에도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 그 모순을 함께 끌어안은 것이 칼빈 신학의 장점이라고 얼버무리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신학에 내재하는 극단적 요소는 사실상 성경 전체 메시지의 균형을 깨뜨려 일부 성경 구절을 다른 성경 구절들과, 하나님의 일부 속성을 하나님의 다른 속성과, 하나님의 사역을 그리스도 및 성령의 사역과 충돌하게 하는 모순과 이율배반과 상반대립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인간의 책임성에 관한 모순된 설명 – “말과 기수” 비유 vs. “저는 말과 기수” 비유 어거스틴, 루터, 칼빈은 타락한 인간은 구원 문제에서 전적으로 무능함을 주장하기 위해 인간의 의지는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노예의지론”을 가르쳤다. 그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말과 기수” 비유를 사용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서 있는 말과 같다. 만약 하나님이 그 위에 올라타신다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올라탄다면 인간의 의지는 사탄이 원하는 바를 원하고 행할 것이다. 누가 올라탈지를 인간이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사탄이 인간의 의지를 지배하기 위해 싸운다” (Luther’s Works 33:65-66; 어거스틴의 동일한 비유는 Pseudo-Augustine, Hypomnesticon II. xi. 20 (MPL45.1632), 그리고 칼빈의 동일한 비유는 기독교강요 II. 4. 1 참고). 그들은 왜 노예의지론을 주장했을까? 그 주장의 문제점은 잠시 후 점검하기로 하고, 먼저 그들의 의도를 살펴보면, 그들은 인간의 오랜 고질병 같은 습성, 즉 나쁜 일은 하나님께 화살을 돌리면서 좋은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에게 공로를 돌리는 교만과 배은망덕, 간사함을 꺾어버리려 한 것이다. 회개도, 믿음도, 거룩한 삶도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못박을 때,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려는 하이에나 같은 인간의 습성은 좌절되고, 영광은 고스란히 하나님께만 돌아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해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듯 보이는 믿음이나 선행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때, 인간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 이단 및 로마 가톨릭주의의 공로사상의 이론적 토대가 되어온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전략은, 인간의 죄된 자부심, 인간의 자기 우상화, 인간의 마귀화를 방지하기 위해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사용한 하나의 비장의 무기였던 셈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믿음도, 순종도, 구원으로의 움직임과 결정도 하나님에 의해 가능하지, 타락한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는 노예의지론은 죄인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게 하려는 목적에서는 탁월한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구원의 영광만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구원받지 못하는 원인, 그의 불신과 죄악된 삶과 영원한 멸망의 원인까지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데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기수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따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기에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옥불로 영원히 고통 받을 죄인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노예의지론의 주장대로라면, 그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하시지 않았기에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와 불신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또 예수님을 믿은 후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사는 성도는, 기수 되신 하나님께서 주권적 은혜로 죄를 이기게 하신 것이기에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도 반복해서 죄를 짓는 신자는 왜 그런가? 노예의지론에 따르면, 그것 역시 기수 되신 하나님께서 죄를 이기게 하시는 데까지 저들을 이끌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노예의지를 주장하는 것에 동전의 양면같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논리적 귀결이, 불신자 및 죄를 반복하는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 또는 거룩한 삶을 가능케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원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노예의지론은 결국 구원과 거룩한 삶만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의 불신앙과 신자의 고질적인 죄들까지 모두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해버리는 주장인 것이다. “말과 기수 비유”에서는 신앙과 순종 뿐만 아니라, 불신앙과 불순종의 책임까지 하나님께 돌아간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이러한 노예의지론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할수없이 추가한 논리는 “저는 말과 기수 비유”로 대표된다. “기수가 한 다리나 두 다리를 저는 말을 타고 간다고 해보자. 그의 말타기는 말의 상태에 좌우된다. 저는 말을 탄 기수는 서투르게 갈 수밖에 없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기수가 절름발이 말을 타고 정상적인 말들 옆에서 나란히 간다고 해보자. 다른 말들은 잘 가더라도, 자신의 말은 제대로 가지 못할 것이다. 말이 치유되지 않는 한 형편은 달라질 수가 없다.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 설사 악한 사람이 악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악한 일의 원인이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사실이다” (Luther’s Works 33:176). “말과 기수” 비유는 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데 비해, “저는 말과 기수” 비유는 그 모든 일 중에서 나쁜 일들의 책임은 “저는 말”과 같은 죄인에게 돌리기 위한 것이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은 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면서도, 나쁜 일에 대한 책임은 면하도록 하기 위해 “불변”과 “강제”를 구분하기도 했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1) 최초의 타락도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 하나님께서 강제하신 일이 아니므로, 멸망과 심판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2)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죄 된 상태에서 선한 상태로 변화될 수 없기 때문에 (불변),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시면 자동적으로 계속 죄에 거하다가 멸망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강제로 멸망시키신 것이 아니다 (강제) (기독교강요 II. 2. 7).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를 망하게 했기에 하나님은 책임이 없다는 이 논리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그렇게도 강조해온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100% 통제하시는 “절대적 주권자”이심을 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구원 문제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인간은 어떤 것도 결정할 권한이 없다고 가르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노예의지론은, 인간의 죄와 멸망에 관한 책임까지 하나님께 전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든 것의 원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노예의지론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에밀 두메그르가 말한 어거스틴, 루터, 칼빈 신학 속에 존재하는 “모순들”, “이율배반들”, “상반대립들”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다. 그들의 신학에는 또다른 “모순들”, “이율배반들”, “상반대립들”도 존재했다. 2. 종속설에 의한 삼위일체 교리의 훼손 –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한없이 무능한 그리스도 많은 분들이 흔히 칼빈은 구원으로의 예정만 가르쳤지, 멸망으로의 예정은 가르치지 않았다는 오해를 하곤 한다. 그러나 칼빈이 예정론을 다루는 기독교강요 제3권 21장의 제목 자체가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제21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다하도록 예정하셨다” (기독교강요 III. 21. 1). 칼빈 자신이 분명히 밝힌 예정은 이중예정이다. 칼빈은 제3권 23장도 “구원으로의 선택은 있어도 멸망으로의 유기는 없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면서 “유기는 선택에 동반되며, 하나님의 뜻으로 하시는 일이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선택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영원한 멸망으로의 유기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단지 구원으로 예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 구원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에 구원만으로의 예정이라는 개념 역시 결과적으로는 이중예정과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지 않은 자들을 정죄하고 멸망시키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하시는 일이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기독교강요 III. 23. 1). 하나님의 예정은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이미 결정지어 놓았기에, 구원으로 예정한 자들에 대한 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 오직 그들만을 위한 구세주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리스도는 오직 그들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고 설명하는 칼빈주의자들의 주장은, 창세 전 하나님의 예정 자체에서 그리스도를 배제시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칼빈주의자들은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과 속성을 가진 삼위일체 중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위격들로 바르게 설명하지만, 예정론으로 들어가면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은 한 마디로 성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종속된 존재,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부속된 하나의 부차적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결정하시는 성부 하나님 아래에 단지 종속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 외에는 누구도 구원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서 그저 주어진 상황을 답답해할 뿐 바꾸지 못해 슬퍼하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들의 주장 속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에 의해 버려진 자들 및 그 비밀에 의해 완악해진 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여러 번 나무라셨다. 그러나 위엄있는 하나님의 의지가 의도적으로 몇몇 사람을 단념하고 버림으로써 멸망시키실 때,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그들 죄많은 사람들의 멸망 때문에 울고 비탄하며 번민하신다. (Luther’s Works 33:146). 이중예정론이 가르치는 그리스도가 무능하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눈물과 탄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웨슬리는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서 이중예정론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종속된 무능한 존재 아니면 심각한 위선자로 만드는 신성모독적인 교리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인을 구원으로 초대하셨음에도 속으로는 초청한 모든 이들의 구원을 원하지 않고 단지 그들 중 예정된 소수만의 구원을 원했다면 그것은 백성을 속이는 일이자, 그리스도는 “가련한 피조물을 조롱하는 자”, “주지 않을 것을 줄 것처럼 말하는 자”, “겉으로 하는 말과 속이 다른 자”, “사랑이 없는 자”, “거짓이 가득하고 성실함이 결여된 자”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악어의 눈물, 즉 자신이 멸망으로 정해 놓은 먹잇감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웨슬리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 23-24). 웨슬리에 따르면, “성경 전체의 내용 및 논지”, “기독교의 계시 전체”는 이중예정론이 만들어 낸 무능하거나 위선적인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정확히 반대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주시요”(요4:4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며”(요1:29),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2),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딤전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심이라”(히2:9),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롬14:15) 등의 말씀이 보여주듯, 사랑의 그리스도는 예정론의 잘못된 주장처럼 예정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나 “구원 받는 이들만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멸망 당할 이들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웨슬리는 강조한다 (웨슬리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 21). 이중예정론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래 종속된 무능한 존재로 만들거나, 그렇지 않다면 구원하지도 않을 사람들을 구원할 것처럼 조롱하는 위선자로 만드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은 사실상 칼빈 자신도 알았기에, 그는 이중예정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태도를 “하나님과 싸우려는 태도”로 몰아붙이면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모든 일을 현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더라도 경건한 사람은 단지 믿어야 한다”는 말로 얼버무린다 (기독교강요 II. 11. 14; 루터선집12, 루터의 “탁상 담화” 6. 623., p. 202). 또 “하나님의 의지 자체는 모순을 지닌 것이 아니고 …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이며 단일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여러 모양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무능력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 행하시는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I. 18. 3)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예정론 주장에는 문제가 없으나,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이성이 문제라며 더 이상의 논의를 회피한다. 칼빈의 예정론 주장에 비해 루터의 예정론 논의는 보다 온건하고 성경적인 입장에 더 다가선다. 루터는 예정론 논의가 신앙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험한 논의임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만한 신앙의 깊이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예정론 논의를 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선택과 관계된 신비에 대하여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정에 관한 논의는 완전히 회피되어야 합니다. ⋯ 만일 여러분이 여기에 대해 계속 논의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말씀, 성례전 등 모든 것을 상실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사기꾼이라고 상상하는 데까지 이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고, 또한 우리가 믿으면 구원이 주어지는 말씀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예정을 생각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찬양은 그치게 되고, 모독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골 2:3). 따라서 모든 것이 정리됩니다. 우리는 선택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간단히 거부합니다”(루터선집12, 루터의 “탁상 담화”문 6. 623., p. 202). 위 인용구에 암시되어 있듯, 루터가 칼빈보다 탁월한 점은, 칼빈의 신학은 성경의 다른 모든 요소를 예정론에 함몰시킬 정도로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성자 그리스도의 사역의 균형을 상실한 데 비해, 루터 신학은 예정론이 가져오는 불안과 공포를 늘 그리스도의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을 집중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데 있었다. 이는 다음 인용구에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비밀의 뜻을 캐묻는 것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계시된 말씀을 능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을 속이는 어떤 신을 스스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확신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확실한 성경을 주셨습니다 …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일고의 여지도 없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 없이 예정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없음에도, 이성은 이 방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자신을 산산이 쪼개가며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이 방법으로 예정을 알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주여 나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옵소서’라고 말했을 때 견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내 등을 네게 보이리라’고만 대답하셨습니다(출 33:18). 이 문제는 하나님에 의해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도들도 그리스도께 어느 때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려고 하시는지를 여쭈었을 때 같은 대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너희의 알 바 아니다’(행 1:7).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계시며, 파악되지 않게 머물러 계시기를 원하며, 감취어 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엄하심을 가까이 보는 자는 그것으로 압도를 당한다’는 말대로 우리는 모든 악의 이름으로 넘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나는 간섭을 받고자 하지 않는다. 거기서 육체의 지혜는 잠잠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 너에게 네 예정을 나타낼 것이며, 계시되지 않은 데서부터 나는 계시된 자가 될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을 잉태케 하여 너에게 네가 예정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리라. 이렇게 하라. 내 말씀 없이 갖게 된 생각을 버리고 이것들을 철저히 없이 하여 지옥에 있는 악마에게 보내라. 여기에 내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죽음과 십자가와 고난을 바라보라. 어머니 품에 누워 있는 그와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를 보라. 너는 그가 말하고 행하는 것을 확실히 알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라 없느니라”(요 14:6)고 주님은 말씀하시며, “빌립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노라”(요 14:9)고 말씀하신다. 거기서 너는 가지며 나를 볼 것이다.’ 그의 아들을 받고 세례를 받으며 그의 말씀을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루터선집12, 루터의 “탁상 담화”문 6. 624., pp. 203-204). “만일 당신이 예정에 관하여 논의하려면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시오. 그러면 곧 예정에 관한 모든 논의가 그칠 것이요” (루터선집12, 루터의 “탁상 담화”문 7. 626., pp. 204-205). 루터는 말년에 남긴 『창세기 강해』(1535-1545)에서도 예정론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유언이라 할 수 있는 말을 남기면서, 자신은 예정론을 가르친 사람으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시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친 사람으로 더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다 (Luther’s Works 5:49). 예정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강조하느냐(루터), 예정론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속시키느냐(칼빈)의 차이는, 루터의 후계자(필립 멜랑히톤 및 협화신조에 동의한 루터란 교회들)와 칼빈의 후계자(테오도르 베자 및 개혁주의 교회들)들이 루터와 칼빈의 예정론을 수용하는 정도가 달랐다는 역사적 측면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루터와 칼빈 자신들 속에 이미 예정론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는 도구로 삼았느냐, 아니면 예정론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까지 함몰시켜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예정론 아래 종속시켰느냐 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했기에, 그들의 후계자들이 이를 감지한 것이라고 보아도 잘못된 해석은 아닐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동일하게 로마 가톨릭교회의 펠라기우스주의를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칼빈보다 성경적으로 훨씬 균형잡힌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확실성을 제시하기 위해 예정론을 강조했고, 루터의 후계자인 멜랑히톤과 루터란 교회는 루터의 예정론을 완화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강조하는 방법으로 루터 신학을 발전시켰다. 이에 비해 칼빈의 후계자인 테오도르 베자는 칼빈 신학의 극단성을 더욱 강화시켰고, 칼빈의 후계자들 역시 칼빈 신학의 극단성을 완화하는 데는 역사적으로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3. 예정론은 하나님의 속성 및 인간의 속성을 심각하게 훼손함 어거스틴이 만들어낸 이중예정론은 기독교 교리 속에 철학의 영향이 지대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신학이 철학과 만날 경우 기독교 사상이나 교리 정립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왔지만, 그 관계를 면밀히 연구해보면 많은 경우 철학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학이 비성경적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거스틴의 이중예정 교리로, 이 교리에 사용된 헬라 철학 개념은 비성경적인 “하나님의 무감성”(impassibility of God) 개념이다. 헬라 철학의 일반적 개념에 의하면 무엇인가 변화된다는 것은 완전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완전한 것은 불변한다. 완전자는 외부에 있는 사물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변하지 않는다. 초기 기독교가 헬라문화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헬라 철학 개념은 다양한 면에서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어거스틴은 이중예정론에서 하나님을, 소수의 사람을 구원하시고 대다수의 사람을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시고도 아무런 고통을 당하지 않는 헬라 철학의 신개념으로 설명했다. 이중예정론, 인간의 상태에 대해 염려도, 후회도 하시며 고통도 당하시는 히브리적, 성경적 하나님 이해를 배제해버리는 정도까지 헬라 철학의 신의 무감성 개념을 절대화한 것이다. 어거스틴 이후 중세 스콜라 신학, 종교개혁 신학의 토대가 된 헬라 철학적 신개념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 중에는, 20세기에 와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전쟁의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는 가운데 세계 안의 고통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자각을 갖게 되면서, 성경 속에서 인간의 고통을 체휼하시는 히브리적 하나님을 새롭게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는 제임스 아르미니우스, 존 웨슬리 등이 이중예정론 속에 들어있는 헬라 철학적 신적 결정론에 반대했다. 웨슬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중예정론의 주창자인 어거스틴, 루터, 칼빈은,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많은 사람이 불행을 겪고 하나님께 버림 받는 이 세상의 현실이 양립될 수 없어보이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을 기어이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해내려 하다가 결국에 이중예정론에 빠지고 말았다 (웨슬리 설교, “인간 지식의 불완전함,” III. 2). 웨슬리는 이중예정론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두 성경적으로 균형있게 이해하려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매듭을 풀 수 없다고 생각해서 매듭을 잘라버린 것”에 비유하면서, 인간이 풀 수 없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불가해성으로 남겨놓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이성을 통해 억지로 해결방법을 내놓으려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체쳐놓는 방식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이론을 성경적 해답이라며 제시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웨슬리는 그런 오류에 빠진 것이 이중예정론이라고 보았다 (웨슬리 설교, “우주적 구원,” 서문 2). 웨슬리가 예정론을 반박한 근거는 (1)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성경이 하나님의 본성을 거룩한 사랑으로 계시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웨슬리에 따르면, 모든 기독교 신학자는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속성이 그의 본성인 거룩한 사랑과 충돌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만약 이중예정이나 성도의 견인 교리가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대항해서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신 것이 된다.”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충돌하게 하는 방법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은 그 본성과 속성 간에 아무런 충돌이 없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분이심을 강조했다 (웨슬리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 11). 웨슬리의 예정론 반박은 (2) 인간의 속성에 관해서도, 성경은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대한 신앙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바르게 반응해야 할 인간의 책임성을 함께 강조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다시 말해, 웨슬리는 성경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할 것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거하는 일 모두에서 인간의 인격적 책임성을 가르친다는 명백한 사실에 기초해, 신앙과 거룩한 삶에 관해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키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식의 예정론과 노예의지론을 반대했다. 웨슬리는 복음만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분, 하나님의 주권을 대하는 인간의 바른 태도와 책임을 가르치신 분은 어느 누구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웨슬리의 두 논점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웨슬리의 첫 번째 논점은, 이중예정론이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중예정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멸망에 그 뜻을 두고 거기서 기쁨을 찾는 악한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웨슬리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 4). 웨슬리는, 이러한 주장이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겔 18:32), “주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40),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7) 등의 말씀이 명백히 가르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범위가 소수의 택자에 제한되지 않고 온 세상 죄인들에 해당됨을 정면으로 부인한다는 사실을 문제시했다. 이러한 성경 해석은 성경의 몇몇 본문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 전체의 내용 및 논지”를 훼손하는 해석 방법으로, 문제의 심각성은 그것이 단지 “기독교의 계시가 자체적으로 상충되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고, “기독교의 계시 전체를 전복시키는 경향”을 가지는 데 있다는 것이 웨슬리의 주장이다 (웨슬리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 23). 웨슬리에 의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은 이중예정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기로 결정하셨으며,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신 데서 드러난다.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희생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예정론은 하나님의 사랑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그 마음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비록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불행”이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웨슬리 설교, “복음의 보편적 전파,” 1-8),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거나, 혹은 그의 사랑의 범위를 축소해 “그의 자비가 그의 모든 피조물이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웨슬리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 26). 또 우리가 하나님께 관한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웨슬리 설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13; 설교 “삼위일체에 대하여,” 16도 참고). 그러한 추측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슬리 설교,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한 괴로움,” III. 7; 설교, “광야의 상태,” II. 1). 인류의 대다수를 영원한 멸망으로 유기한다는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 반면, 성도의 견인 교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으로 누군가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나, 자신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죄를 단지 묵과하시지는 않는다. 웨슬리는 하나님은 언제나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앙을 버려 그리스도의 피를 다시금 모독한 사람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잭슨판 Wesley’s Works 10:242-251). 심지어 신자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 안에 있다 하더라도, 웨슬리는 신앙과 사랑, 순종을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언제나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웨슬리 신약성서주해, 요한복음 10:27-29.) 웨슬리의 두 번째 논점은, 이중예정론이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인간에게 부여하신 고귀한 속성들조차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에 인격적으로 반응할 능력조차 없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웨슬리는, 만약 사람이 자유의지를 조금이라도 가졌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 전체를 행하지 않은 것이 되고,” 따라서 “모든 영광을 홀로 받으실 수 없게 된다”는 주장을 잘 알고 있었다 (잭슨판 Wesley’s Works 10:229-230).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웨슬리가 언제나 염두에 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의 은혜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인간의 책임성을 부인하거나, 인간의 책임은 더 중요하게 다루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취급하는 양극단에 빠져드는 것을 흔히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윌리암 캐논은, 웨슬리 신학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궁극적 토대”는 “바로 하나님의 본성과 특징 그 자체”라고 바르게 주장한다 [William R. Cannon, The Theology of John Wesley (New York: Abingdon-Cokesbury Press, 1946), 153]. 다시 말해, 웨슬리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 일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사역 방법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이 인간 창조의 동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로부터의 사랑과 경배를 원하시며, 또한 피조물들도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이처럼 인간이 본래부터 가진 능력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능력을 부여하셔서 가능케 하신 대신, 대인, 대물 관계라는 관점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입장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이해한 것이다 (웨슬리 설교, “율법의 기원, 본성, 속성 및 용법,” I. 2-3). 펠라기우스주의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의한 공로를 주장하는 것과,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에 순응해야 할 의무 사이를 구분해야 함에 대해서는 아래의 링크 참조(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429193753867525&id=100003307410309 ) 이 점에서 웨슬리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식 노예의지론과 이중예정론을 과도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을 과도하게 무능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인간의 운명을 과도하게 숙명론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하나님의 사랑을 희생시킬 정도로 과도하게 독단적이고 무감정적인 능력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웨슬리는 “구원을 위해 충분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지속하기 위해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요구 사이의” 긴장 중 어느 것도 희생시키지 않는다 [Charles R. Wilson, “The Correlation of Love and Law in the Theology of John Wesley,” (Ph.D. dissertation, Vandervilt University, 1959),100-101; 잭슨판 Wesley’s Works 8:289]. 이로써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아야 할 책임을 보존하는 동시에, 율법과 복음의 선포와 교육, 훈련과 양육이라고 하는 교회의 사역에 긴급성과 중요성을 보존한다 [James Gregory Crofford, “Streams of Mercy: Prevenient grace in the Theology of John and Charles Wesley” (Ph.D. thesis, University of Manchester, 2008), 131]. 4.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예정론 vs. 초기 기독교 교부들, 아르미니우스, 웨슬리의 예정론 칼빈 학자 슈티켈버거가 예정론은 “칼빈의 가르침 중에 가장 논쟁이 된 가르침”이라고 한 말은 매우 정확한 말이다 [정성훈 편, 『칼빈과 복음주의 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314]. 이중예정론은 어거스틴이 창작해낸 5세기 기독교 때부터, 루터와 칼빈이 다시 강조한 종교개혁 시기를 거쳐 현재에까지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켜왔고 또 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장 심하게 반대를 받아온 교리로서,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의 의미를 매우 심각하게 왜곡한 인간의 창작물이다. 예정론의 대표적인 근거 구절인 에베소서 1장 3-12절과 로마서 9-11장을, 어거스틴, 루터, 칼빈 세 사람과, 그 세사람을 제외한 초기 기독교의 모든 교부들, 빈켄티우스, 오렌지 공의회, 제임스 아르미니우스, 존 웨슬리 등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가? 4-1. 예정론의 중요 근거 구절, 엡 1:3-12에 대한 해석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에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따르는 이중예정론자들은 (1) “창세 전에 … 우리를 택하사”, (2)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3) “그 기뻐하심을 따라 … 예정하신 것이니”, (4)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등의 네 가지 표현을 강조한다. 즉, 이중예정이 이루어진 시점은 “천지를 창조하기도 전”이며, 예정과 유기의 근거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 마음에 원하시는대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제외한 초기 기독교의 모든 교부들, 빈켄티우스, 오렌지 공의회, 제임스 아르미니우스, 존 웨슬리 등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4회만 언급한 “예정”보다 훨씬 많은 횟수로 언급할 뿐만 아니라, 전체 문맥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한 문구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문구라고 해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문맥 속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한번 살펴보자. (1)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심, (2)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심, (3)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 (4)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는 풍성하심, (5)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음, (6)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심, (7)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 (8)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됨, (9)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즉,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게 된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쓰인 성경구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1)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주시는 모든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안에” 모두 담아놓으셨기에 우리가 그 모든 복을 받는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세상에 보내기로 결정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택하신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의지대로 예정하심의 본질적 내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로 자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결정해놓으신 예정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 그의 삶과 사역과 죽음 모두의 결과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5)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죄 사함을 받는다. 즉, 그리스도의 피를 자신의 속죄를 위한 것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는 누구나 죄 사함을 받게 된다. (6) 하나님께서 주권적이고 절대적으로 예정하신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이다. (7) 하나님께서 한 때 원수 되었던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다시금 화목하게 만드시는 방법으로 택하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원수되었던 우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시기로 결정하셨다. (8)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예정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이다. (9)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게 된 우리가 그의 영광을 찬송하며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에베소서 1장 3-12절이 가르치는 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모든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로 예정하셨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하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정론에 의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구원의 역사(구속사)란, 창세 전부터 구원받을 자의 범위가 이미 결정되어 있기에 구원으로 결정되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실천적이고 부속적인 과정으로 필요한 역사(이중예정론의 관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구원자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통해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통해, 또 성령을 통한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삼위일체의 구원 사역의 역사가 구속사이다.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은 이미 결정되어있는 예정을 성취하는 부속적 도구로 세상에 보내어진 것(이중예정론의 관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그리스도를 통해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정은 개개인을 구원으로 결정하셨느냐 아니면 영원한 멸망으로 유기하시기로 결정하셨느냐를 말하는 개개인의 예정이 아니라, 구원자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 중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구원의 방법의 예정이다. 따라서 성경적 예정론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결정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다. 4-2. 예정론의 중요 근거 구절, 로마서 9-11장에 대한 해석 로마서 9-11장에는 흔히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을 지지한다고 여기는 여러 비유와 설명이 나온다. (1) 예를 들어, 바울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 9:12-13)라고 하신 말씀을 언급하면서, 이 사건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롬 9:11), 즉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그 후에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롬 9:15) 주권자시라고 설명한다. (2)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로를 진노의 그릇으로 세우신 일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7-18)라고 설명한다. 그 후 바울은 하나님이 바로를 그렇게 만들었다면 바로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그러면 하나님이 어찌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롬 9:19) 하나님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 대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라는 말로 답한다. (3) 바울은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거나 심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 토기장이와 진흙 비유를 사용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 9:21). (4) 바울은 돌감람나무였으나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와 원래는 참감람나무 가지였으거기서 잘려나간 가지를 언급한다 (롬 11:17-24). 어거스틴, 루터, 칼빈은 모두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에서 강조한 것은 죄인을 구원으로 선택하실 수도 있고 영원한 멸망으로 유기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해석하면서, 야곱과 에서는 개인의 선택과 유기를 보여주는 사례, 바로는 유기의 사례, 토기장이 비유와 감람나무 비유들 역시 선택하시거나 유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라고 주장한다. 4-3. 예정론의 중요 근거 구절, 로마서 9-11장의 문맥 안에서의 해석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쓴 목적 및 로마서 속에서의 9-11장의 문맥을 철저히 무시한 데서 비롯된 해석이다. 성경적인 예정론을 이해함에 있어 어거스틴, 루터, 칼빈 세 사람과 전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초기 기독교 교부들, 빈켄티우스, 오렌지 공의회, 아르미니우스, 웨슬리 등의 해석은 로마서 9-11장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음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바울이 가르친 하나님의 주권이 과연 어떤 주권인가에 대해서는 이들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과 전혀 의견을 달리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로마서 9-11장을 문맥 속에서 살펴보자. (1) 로마서 9-11장의 그 맥락을 잘 살펴보면,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민족적인 선택을 받았고 율법을 받았다는 이유로 “선민사상”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었음과, 반면 이스라엘이 무시하였던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어 구원받았음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왜 로마서 9-11장에서 토기장이 비유를 들면서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냐”라는 말로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대해 따지며 왈가왈부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된다고 했는지, 그 의도를 나타내는 핵심구절은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4)라는 말씀에 잘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 주권적 은혜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개 취급하면서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이방인들까지도 이제는 귀하게 여기시는 그릇으로 삼으셨고 구원의 참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이신 것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왜 자신들만이 선민임을 호소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주시는 것에 대해 부당함을 호소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9-11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인류의 소수에게는 구원을 주시면서 인류의 다수는 멸망으로 예정하시는 주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방인들을 포함해 온 인류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포함시키셔서 그들 모두를 향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신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선택의 교리, 이스라엘의 알량한 선민사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확장에 반대하면서 우리만 선민이니 이방인은 구원의 자격이 없다고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너희가 어떤 권리와 자격으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대항하고 대적하느냐며 그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도 바울이 동일한 본문을 통해 오늘날의 소수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을 향해 동일한 내용의 책망을 하고 계실 것이라고 믿는다. “소수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여, 하나님께서 소수의 선민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는데, 너희가 무슨 권리로 하나님께서 넓혀놓으신 구원의 범위에 반대해 너희 마음대로 예정된 자, 아닌 자를 구분하느냐? 너희가 누구관대 감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실행에 도전해 과거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어째서 소수의 예정된 자에게만 구원을 주시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 하십니까?’라며 하나님을 힐문하느냐?”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소수의 사람에게 제한하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활짝 열어놓으신 사실을 로마서 9장 25-26절에서도 다음과 같이 확증한다.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 따라서 로마서 9-11장은 역사 속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은 신학적 오류, 즉 소수를 선택하시고 나머지를 버리신다는 인간적 교리를 교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성경 본문이다. 다시 말해 예정과 선택을 지지하는 성경구절이 아니라 정반대로 예정과 선택에 대한 믿음인 선민사상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구원의 조건임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이 사실은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롬 11:20)라는 말씀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의 조건은 그들이 선민 이스라엘에 속했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음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3) 로마서 9-11장의 설명 속에서 바울은 무조건적인 국가적 선택(national election)과 조건부인 개인적 선택(individual election) 사이를 구분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것은 전자 즉 무조건적 국가적 선택이지, 후자 즉 이스라엘 백성 중 어떤 개인이 구원을 받고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지에 대한 예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의 구원과 멸망은 언제나 조건부인 개인적 선택에 의한 것이지, 무조건적 국가적 선택에 따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국가적 선택을 하신 이스라엘 중에도 불신앙으로 인해 구원받지 못할 개인이 있는 반면, 국가적 선택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국가적 선택을 받은 유대인이든 국가적 선택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든 개개인의 구원의 결정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다. (4) 성경적 예정론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을 주로 개개인의 구원과 멸망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보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의 계획 속에서 그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다양한 종류의 선택을 포괄적으로 다룬다. 웨슬리안이 가르치는 예정의 포괄적 개념을 세분화해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a.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그리스도를 온 인류의 구원자로 선택하심 예를 들어, 성경적 예정론의 가장 핵심이자 본질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선택하신 바로 그 예정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선택하신 것은, 그를 통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구원을 이루어가시겠다는 주권적 결정으로, 하나님은 구원자 그리스도가 이루실 사역을 통해, 또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맺는 신앙의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 이사야 42장 1절 말씀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는 말씀으로 설명한다. 또 베드로전서 2장 6-7절은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는 말씀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에베소서 1장 3-1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복도, 택함도, 예정도, 은혜도, 구속도, 연합도, 기업도, 찬송도 있다고 설명한다. b.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을 이루어갈 집단을 선택하심 바울이 로마서 9-11장에서 야곱과 에서의 선택을 언급한 이유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해석처럼 야곱과 에서 개인이 구원받았느냐 아니냐 라는 개인적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해나갈 민족 또는 국가를 선택하신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창세기 25장 23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라는 말씀에서 이미 나타난다. 선택 받은 국가나 집단 안에 있다 하여도 구원은 믿음에 의한 개별적 구원이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3장 8절은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말씀하고, 갈라디아서 3장 7-9절 역시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2장 29절 역시 ”, 롬2:28-29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말씀한다. 이 모든 구절들은 비록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갈 민족과 국가를 선택하셨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개개인의 구원의 결정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음을 말씀한다. c. 하나님께서는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 특정한 개인들을 선택하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구원 계획을 이루어가시기 위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개인을 선택하셨다. (느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롬9:7-14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모세나 다윗, 고레스 같은 특별한 지도자 선택하셨다. (시106:23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시78:70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사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베드로, 바울과 같은 특별한 사도를 태어나기 전부터 계획하시고 선택하셨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갈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d. 그리고 확장된 하나님의 백성의 공통체로서 교회를 선택하셨다. (엡2:11-13 “너희는 …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롬11: 20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4-4. 웨슬리의 로마서 9장 29-30절에 대한 설명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웨슬리는 설교 “예정에 대하여”에서 로마서 8장 29-30절(“하나님이 (1)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2)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3)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4)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5)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말씀에 대해, 이 구절들은 예정론에서 인과관계의 고리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서를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1) 예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완성 때까지 모든 세대를 하나의 순간같이 보시며, 모든 인류의 마음에 있는 그 무엇이든 단 한번에 보시면서 각 세대와 나라에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가릴 것 없이 모두를 단번에 아신다” (여기서 미리 아심은 그렇게 되게 만드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도 거기에 바르게 응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사람과 그것을 거부할 사람을 미리 아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거나 거부할 자유조차 없다면 인간은 도덕적 책임을 지거나 상벌을 받는 존재조차 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2) 예정하심: 이 예정은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며 믿지 않는 자는 영벌에 처할 것”이라는 “변할 수 없고, 파기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칙령”을 의미한다. (3) 부르심: 외적으로는 은혜의 말씀, 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 부르심,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용납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자녀라 부르심 (4) 의롭게 하심: 실제로 의롭게 변화시키심,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적합하도록” 거룩케 하심 (5) 영화롭게 하심: 마지막 단계, 골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심”, 마25:34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그들에게 주심” 웨슬리는 이를 역순으로 설명하여 (1) 영화 되기 전 거룩함 필요,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2)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에는 거룩할(성화될) 수 없음: 죄인을 용서하시고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이 우리로 사랑하도록 변화시키심 (3)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께 나아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음 (4) 하나님의 부르심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이, 믿는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예정)임. (5) 하나님은 모든 일들과 모든 사람들을 미리 아심 따라서 웨슬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가 영화롭게 된 사람입니까? 먼저 성화된 사람입니다. 성화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먼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먼저 예정된 사람입니다. 예정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믿을 것을 먼저 아신 자입니다.” 웨슬리는 어거스틴, 루터, 칼빈 식의 예정론(예정실행)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설명한 이러한 순서의 예정론이라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그것을 수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인간의 인격적 책임성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V. 현대 기독교에서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 등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차지하는 위치 지금까지의 역사적, 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이제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과 같은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 현대의 신학 지형에서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잠시 논해보자.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은 단지 웨슬리만 이단 혹은 이단 옹호자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신교 내에서 이중예정론과 노예의지론적 극단을 받아들이지 않는 타 교단들 전체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심지어 같은 칼빈주의 내에서도 자신들과 같은 극단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을 이단적이라며 공격하는 매우 무모하면서도 끝없는 용기를 가진 신학적 소수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적이고 사도적이며,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모두 인정했고, 종교개혁 이후에도 대부분의 루터란 교회들과 온건한 칼빈주의자들이 인정하는 성경적 가르침 위에 서 있지 않고, 어거스틴이 창작해낸 극단적 교리에 기초해 자신들과 함께하는 신학적 소수자들 외에는 모두 이단적이라며 공격하고 있다. 사실은 자신들이 교회사 전통과 교리사 전통에서 신학적 창작물을 신봉하는 이단적인 소수자들임에도 말이다. 흔히 극단적 칼빈주의자라고 하면 칼빈주의라는 폭넓은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수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오해하지만, 실상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 중 자신들 방법 외에는 모두 이단으로 공격하는 매우 극단적 소수자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넓은 의미의 칼빈주의와는 구별되는 하나의 섹트(sect)로서, 개신교 내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하나의 소종파 집단이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 국내 장로교에서 칼빈주의의 극단을 완화시켜 성경을 보다 균형있게 해석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김세윤 박사, 최갑종 박사, 권연경 박사 등을 들 수 있는데, 극단적 칼빈주의 소종파 집단에 속하는 최덕성 박사, 서철원 박사, 정이철 목사 등은 그들조차 비성경적 또는 이단적 교리를 가르치는 문제 많은 학자들로 비난한다. 좀 불편한 이분법일 수 있지만 한편에는 김세윤과 최갑종과 권연경을 묶어놓고, 다른 한편에는 최덕성과 서철원과 정이철을 묶어놓고 한번 생각해보자. 누가 칼빈주의를 대표하는가? 전자의 그룹이고, 후자는 개신교에서 독불장군 행세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극단적 칼빈주의 섹트 소수자일 뿐이다. 장로교 목회자들에게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처럼 온건한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장로교 목회자들이 가진 신학과 목회 사이의 부조화와 이중성 때문이다. (1) 대부분의 장로교 목회자들은 강단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웨슬리처럼, 또는 웨슬리 신학과 유사한 내용을 가르친다. (2) 그러면서도 그들은 신학을 말할 때는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이 주장하는 극단주의에 편승해 개신교 내 형제 교단인 성결교, 감리교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만약 장로교 목회자들이 소수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말을 인용해가며 웨슬리안 교단을 정죄하는 내용을 역으로 자신들의 가르침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들은 실상 자신의 입으로 자신들이 가르친 내용을 이단적이라고 정죄하는 매우 모순되고 무지하며 불합리한 태도를 보였음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극단적 칼빈주의 소수자들의 주장을 따라 웨슬리안 교단을 이단으로 정죄해온 장로교 목사들은 사실상 장로교 집단 이기주의에 편승해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둘로 쪼개어 이단으로 내치는 매우 질나쁜 범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은 주님 앞에서 학자로서 타 신학 전통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서 이단으로 공격해온 무지함과 불성실함, 하나님의 교회를 산산조각 내면서도 자신들이 악한 자들과 싸우는 개선장군인 양 하는 교만함을 회개하라!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과 같은 극단적 주장을 하는 자들의 근거없는 비난에 편승해, 타 교단 교회는 이단적이니 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장로교 집단 이기주의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편갈라온 장로교 목사들은 당신들의 신학적 무지와 하나님의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해온 악함을 회개하라!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열시키지 말고, 더 이상 자신의 무식함을 드러내지 말고, 이제 앞으로는 웨슬리 신학과 웨슬리안 교단들을 이단적이라고 공격하는 하나님께 심판 받을 짓을 지속하지 말고 이제는 멈추라! (혹시 저의 지나친 신학적 판단과 지나치게 공격적인 표현으로 마음 상하신 루터란 형제자매들과 개혁주의 형제자매들께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 글은 웨슬리와 웨슬리안 교단들을 이단 혹은 이단 옹호자로 공격해온 최덕성, 서철원, 정이철 같은 신학적 소수자에 대한 응답임을 양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작권자 ⓒ 목회와진리수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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