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진리수호

바른믿음 조덕영박사 논평에 대한 이재위목사 반론 1

본 논평에서 조덕영박사의 신학적 편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 부활을 종말론적 부활로 해석하여 역사적 부활사건을 기독교 변증학적인 관점으로 보지 못한 부활의 편협적 개념에 근거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재위 | 기사입력 2017/01/20 [04:56]

바른믿음 조덕영박사 논평에 대한 이재위목사 반론 1

본 논평에서 조덕영박사의 신학적 편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 부활을 종말론적 부활로 해석하여 역사적 부활사건을 기독교 변증학적인 관점으로 보지 못한 부활의 편협적 개념에 근거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재위 | 입력 : 2017/01/20 [04:56]

바른믿음 조덕영박사 논평에 대한 이재위목사 반론 1
 

 조덕영박사는 김성로목사 신학세미나의 논평자로 참석하여 김성로목사를 부활교 이단이라고 단정하며 정죄하는 논평을 올렸고 필자는 이에 대한 반론을 올렸다. 하지만 조박사는 바른믿음 사이트를 통해 ‘이재위 목사의 글은 국내 <목회와 진리수호>와 <무물> 카페에 실려 필자의 글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수준 이하의 글에 필자는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김성로 목사 두둔 말고 그 이대위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미 남침례교의 수준인가?’ 라는 내용을 게시하여 필자의 반론에 대해 악의적 왜곡이며 수준이하의 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조박사는 필자의 글이 왜 악의적 왜곡이며 수준낮은 글인지 필자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반론해 주기를 바란다.

                  (바른믿음측 찬조연사 조덕영 박사)


필자는 조박사의 논평이 작금 한국 일부 신학자들의 객관성이 결여된 비평의식의 부재와 무책임한 논평사례를 볼 수 있는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논평임을 보게 된다. 필자는 왜 조박사의 논평이 연구 자세가 결여된 비평인지, 왜 기독교 윤리를 무시한 신학자의 무책임한 발언인지에 대해 성경신학, 조직신학, 기독교변증학적인 관점에서 반론하려고 한다.

조덕영박사는 첫째, 미숙한 신학의 참사 - 바른신학의 중요성에 바른신학에 대응하는 나쁜 신학과 미숙한 신학이 있다고 주장하며 나쁜신학은 지상에 노출되나 미숙한 신학은 잠재적 큰 위험을 내포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한 예로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 폭파하여 승무원 7명이 죽은 충격적 사건을 제시하면서 챌린저호가 폭발한 근본 이유는 수백만 부품 가운데 탄력을 잃은 불량한(미숙한) 고무 링이 문제였다는 예를 통해 선무당이 사람 잡듯 미숙한 신학이 가져오는 신앙적 참사는 챌린저호와 유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박사께서는 문제 제기 시작부터 바른 비평적 자세의 부재를 파악하게 된다. 챌린저호의 폭발은 미숙한 고무링의 문제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사고의 원인은 발사 당일, 추운 날씨로 인해 발사대에 고드름이 생겼다. 그래서 오른쪽 SRB의 O링(고무패킹)이 추운 날씨로 인해 얼어 버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술자들은 매우 낮은 온도가 O링을 얼게 하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조언하였지만 NASA와 치오콜사의 고위 관리자들은 기술자의 말을 무시하고 발사를 허가한 것이다. 즉 챌린저호의 폭발원인은 본질적으로 고무링의 문제가 아니라 추운 날씨로 인한 환경 때문이었고 전문 기술자의 권면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 김성로목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는 정이철목사의 주관적인 신학적 가치 기준으로 본질적인 설교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고 심각한 오해와 곡해를 통해 왜곡 편집하여 일어난 참사라고 할 수 있다.
즉 조덕영박사의 논평은 왜곡 편집된 일방적인 주장만을 반영하여 현 사태의 본질적인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정이철목사의 주장만을 수용하여 단순히 부품의 문제만 지적하는 편협적이며 Fact에 근거하지 않은 주관적 견해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박사께서는 앞으로 논평을 할 때 정확한 Fact를 가지고 문제를 제시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김성로목사와 정이철목사의 주장을 몇 달을 걸쳐 객관적으로 연구 조사하고 있는 필자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정독하셔서 판단하기를 바라고 필자의 반론을 무시하지 않기를 부탁드린다.

조덕영박사의 심각한 비평의식의 부재의 또 한 예로 “바른믿음 사이트를 통해 정이철,림헌원, 이창모, 김대운목사, 권동우대표 등의 최근 글들을 통해 볼 때 김성로목사는 여전히 미숙한 주장들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고 보여진다. 미숙함이 나쁜 신학보다 더 악영향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라고 주장한다.

조덕영박사가 논평에 참고한 5명의 목회자들 중에 정이철, 림헌원, 이창모목사 세 명은 약 일 년부터 적극적으로 김성로목사를 사악한 이단이라고 단정하며 주장했던 사람들이고 나머지 두 분도 객관적인 검증이 아닌 정이철목사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받아들인 객관성이 떨어진 인물들이라 생각된다. 과연 이들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주장인지 검증해 봐야 할 것이다.
 비평자의 기본적인 태도는  비평되지 않은 일차자료를 가지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며 저자의 전체적인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조덕영박사의 논평은 신학자로서 비평자가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의 부재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김성로목사가 십자가를 우상처럼 붙잡지 말라고 하는 표현은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즉, 십자가의 참 의미를 모르고 십자가 자체에 능력있는 것처럼 십자가를 우상처럼 붙잡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김성로 목사가 십자가를 무시했다고 하는 것은) 설교자의 의도를 무시한 정이철목사의 왜곡 편집된 주장이다. 조박사께서는 정목사의 왜곡 비평된 기사만을 참고 하지 마시고 일차 자료 즉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전체 설교들과 한마음교회 자료, 칼럼 등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독하시고 다시 평가하길 바란다.

이번 부활복음 신학적 토론 논평자로 참석한 조박사께 신학자의 양심으로 묻고 싶다. 김성로목사의 설교들과 칼럼, 책자들, 간증들을  정독한 적이 있는가? 만약 객관적인 자료를 검토하지 않았다면 조박사께서 아무리 조직신학박사지만 김성로목사를 비평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의견에 동의 하시는지?
 
둘째, “의인인 동시 죄인인 인간의 취약성- 부활 아닌 오직 십자가가 살린다.! 부활 구호가 절대로 인류를 살리지 못한다.” 라고 주장한다.
“부활 구호가 절대로 인류를 살리지 못한다. 인간은 대단히 취약한 존재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 추방당하고 영원한 우주적 붕괴를 초래한 것은 겨우(?)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먹거리 언약을 지키지 못한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부활 구호가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다. 인간은 단순히 주문처럼 부활복음을 외친다고 변화되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재위 목사의 반론

조박사는 영원한 우주적 붕괴가 겨우(?) (물음표를 통해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단서를 붙였지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먹거리 언약을 지키지 못한데서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만약 조박사의 견해대로 겨우 먹거리 언약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복음의 오류가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겨우 먹거리 정도가 아니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의 유일한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지을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계명이었으며 가장 큰 축복 중에 하나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완벽하게 창조 되었으며 하나님의 지, 정 ,의를 소유하였고 지구를 다스릴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우셨고 완전한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조건은 하나님 안에서 이 모든 자유와 특권이 유지 된다는 것이다. 선악과는 인간을 시험하려고 주신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과 피조물을 경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며 선악과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러한 선택도 인간을 로보트처럼 프로그램화 시키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격적 존재로 지으셨다는 증거가 선악과이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인간은 결국 교만해져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 하고 자신이 주인되어 살 수 밖에 없는 저주 받은 인생이 된 것이다. 결국 복음의 근본적인 회복은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

이 땅은 흑암이다. 인간의 감정과 느낌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으며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흑암같은 이 땅에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복음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십자가의  피의 능력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 부활사건이 중요한가? 역사적 부활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역사상 가장 큰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인식되어 믿게 될 때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은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대속의 피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김성로목사는 부활을 주문처럼 외치는 것이 아닌, 부활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증거하는 것이다. 조박사의 견해대로 인간의 속죄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부정할 목회자가 어디 있는가? 김성로목사는 인간의 속죄를 이루신 예수가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최고의 증거는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남침례교 신약학 박사인 스탠리 그렌즈는 ‘신약성서의 기자들에 의하면, 십자가는 부활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있는 계시가 아니다. 성금요일의 십자가는 부활절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십자가의 어둠을 몰아내고 그 십자가를 새로운 날의 빛으로 가져온다. 부활절 선포의 눈을 통해 볼때.. 오히려 십자가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 준 분의 자기 희생에 대한 영광스러운 절정이었다. ‘ (스탠리 그렌즈 조직신학 발췌)

조박사께서 악과 시련과 핍박과 죽음조차 감당하려는 진정한 용기와 소망은 부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온다고 말씀하셨는데 필자의 견해는 초대교회 제자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탠리 그렌즈 박사의 견해 대로 부활을 확증하여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이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부활사건은 십자가를 인간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하는 능력이며 결국 신자는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 앞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진노 아래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역설적 사랑 속에 눈물을 쏟고 감격하는 것이라고 하신 조박사의 견해에 일부는 동의하지만,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인식되지 않은 십자가는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십자가로 전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생명걸고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살아나셔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 사실이라면 십자가의 대속의 피는 온 인류의 죄를 용서할 보배로운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의 피임을 확실히 증거해 주는 것이며 이것이 사도들이 생명걸고 부활을 증거한 이유이다.

“예수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행 4:2)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행 4:33)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행 17:18)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 23:6)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한 것뿐이라” (행 25:19)

조박사의 주장처럼 “의인인 동시 죄인인 인간의 취약성- 부활 아닌 오직 십자가가 살린다.” 라는 표현은 속죄론적 관점에서는 맞는 표현이지만 구속의 이중적 의미에서는 바른 신학적인 표현이 아니다. 구속의 이중론적인 관점에서 바른 성경적 표현은 인간을 살리는 것 즉 죄에서 죽고 완전히 자유로운 삶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완성된다고 표현해야 편협적이지 않은 바른 신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원수가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는 (1)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2)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화목된'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각각 '카탈라겐테스'와 '소데소메다'이며 이 둘은 모두 1인칭 복수 수동태이다. 이는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3:25-28). (호크마주석)

즉 바울은 하나님과 원수된 과거의 상태와 구원받은 현재의 상태를 동시에 말하면서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결국 인간의 구속은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춘천 한마음교회의 부흥이 단순히 부활구호를 외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부활을 주문처럼 외운다고 사람이 변화된다면 그것이 기적이다. 조박사의 논평은 논리적 비약이 심한 주장이다. 이에 대해 김성로목사와 한마음교회에 겸손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조덕영박사의 주장

세번째, 십자가를 냉소적으로 조롱하며 얻는 부활신앙? 하나님은 십자가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 전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유튜브 설교”에서 “쓸데없이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며 십자가를 냉소적으로 취급하며 부활 신앙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했다. 놀랍게도 부활의 장인 고린도전서 15장조차 실은 부활이 중심은 아니다. 오히려 교만하고 은사를 자랑하고 미숙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부활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장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4). 죄악이 만연하고 미숙한 고린도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부활의 장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그리스도로 시작하여(1-4절 참조)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57절 참조)로 인도한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전체도 부활이 아닌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나는 책임을 기억하라!
 

이재위 목사의 반론

조박사께서는 김성로목사의 전체적인 설교를 듣지 않고 일부 편집된 설교를 통해 김성로목사가 십자가를 ‘쓸데없는 십자가’라고 주장하고 십자가를 냉소적으로 취급하며 부활신앙을 강조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김성로목사의 투박한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김성로목사의 전체적인 설교의 의도를 이해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다.

김성로목사는 당장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십자가에 누가 죽었는지 모르고 단순히 죄사함의 원리, 피의 능력 등 속죄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역사적 부활사건을 통해 확증한 후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죄사함의 원리를 전달하는 하는 것이 바른 변증적 순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김성로목사는 설교 서론에서 자신은 절대 십자가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설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십자가는 이천년 전 저주 받은 로마 형틀이었지만 이 십자가가 능력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며 이 엄청난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가장 큰 사건은 역사적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김성로목사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자랑은 십자가이지만 십자가의 사랑을 객관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최고의 증거는 역사적 부활이다. 그래서 김성로목사는 역사적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확증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참고로 김성로목사의 설교를 들은 일반 성도들의 댓글 내용을 참고 하시길 바란다.

좋은열매, 2016.10.20 11:47:48
목사님 감사합니다. 저도 어찌 반박해야할지 몰라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감정적인 것 없이 객관적이고도 성경적으로 대답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하나님이심이 분명해졌고 그로 인해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이전에 알던 그 사랑과 은혜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성로목사님은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얼마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시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 이런 사랑이 어디 있느냐며 십자가를 선포하시는데..십자가를 무시한다니요.. 정이철 목사의 왜곡과 모함에 너무나 통탄스럽고 마음이 아픕니다..

민희은맘 2016.10.20 15:05:48
목사님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찬양과 영광을 올립니다. 역사적 사실인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증거이며,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이신 것이 선명해지니 예수님의 크신 사랑도 예수님의 말씀도 선명해집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응해 주시는 이재위 목사님과 사역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권오수 2016.11.09 04:54:24
성실한 반론으로 정리하여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이재위 목사님께서 수고하여 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을 중단해야 합니다. 부활의 강조는 십자가를 대적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자체가 뭘 모르고 말하고 있음이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 혼자 똑똑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나요? 부활의 강조가 어떻게 십자가를 대적한다고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강조는 오히려 십자가를 재조명하며, 십자가의 사랑을 확증하여 풍성하게 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의 본질적 의미

조박사께서 고린도 전서 15장의 본질적인 의미를 “고린도전서 전체도 부활이 아닌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끝나는 책임을 기억하라!”라고 주장한다. 필자도 성경 전체의 주제가 부활이 아닌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신학자이신 조박사께서 고린도 전서 15장의 본질적인 의미를 그리스도론으로 단순하게 해석한다면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의 바른 자세인지 의문이 든다.
물론 성경 전체의 주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지만 15장에서 사도바울이 전하려고 하는 구체적인 성경 신학적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이다.

고린도 전서 15장의 기록목적은 조박사의 견해처럼 교만한 은사주의자들에게 본질적으로 붙잡아야 할 구원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고전 15:1-4) 또 일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이 본 절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을 경우 도출되는 결과를 제시하고 있는 내용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 없으면 결국 인간은 영원히 죄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즉 부활 없는 십자가란 더 이상 ‘우리의 대속을 위한’ 십자가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당시의 일부 고린도 교인들처럼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죄인의 구속도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과의 화해도 없으며,생명도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설명이다.

즉 고린도 전서 15:17의 성경신학적인 바른 해석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두 가지의 결과가 도출될 것인데 첫째는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둘째는 ‘그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란 점이다.
여기서 ‘헛되고’ 로 번역된 ματαία ‘마타이아'는 14절에 언급된 ‘κενὸν 헛것(케논)’보다 더 강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κενὸν ‘케논’이 현실적인 것을 소유하지 못해 공허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ματαία ‘마타이아’는 미래의 삶을 보장할 수 없어 공허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부활(종말론적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믿음은 그들을 죄에서부터 해방시켜 구원으로 이끄는 믿음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이 전수 받은 믿음이란 김성로목사가 강조하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역사적 부활사건(죽으심과 살아나심)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대상 자체가 허상이 된다면 믿음의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 용서가 무효화 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주장하면서 만약 이렇게 된다면 바울이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을 경우 도출되는 두번째 결과로 제시한 바와 같이 결국 인간은 영원히 죄 가운데 거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즉 부활 없는 십자가란 더 이상‘우리의 대속을 위한’ 십자가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당시의 일부 고린도 교인들처럼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죄인의 구속도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과의 화해도 없으며,생명도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 해야 성경신학적인 바른 해석이라 사료된다. 롬 4:25을 통해서도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그리스도인들을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대표 되신 그리스도께서 죄의 삯인 사망에게 영원히 패배하여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되므로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의 죄의 빚은 탕감 받지 못한 상태로 존속하는 것이다. 즉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전파한 복음의 내용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이고도 객관적인 부활 사건이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5장을 통해 김성로목사가 증명하고 싶은 핵심적인 내용은 부활신앙이 아닌 역사적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또 구속의 완성이 부활사건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 논평에서 조덕영박사의 신학적 편견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 부활을 종말론적 부활로 해석하여 역사적 부활사건을 기독교 변증학적인 관점으로 보지 못한 부활의 편협적 개념에 근거한 해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J.P. 모어랜드(Moreland) 박사는 예수의 부활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상황적 증거를 제시한다. 부활 사건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으로 확증케 하는 지상 최고의 역사적 사건이다. 즉 부활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심으로 십자가의 대속의 교리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얼라이언스 신학대학원에서 전도와 현대 사상 학과장을 역임한 기독교 변증학자 재커라이어스박사는 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에 대한 질문에 "왜 예수님을 유일한 길로 믿을 수 있는  첫 번째는 예수의 부활 때문이다. 부활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의 신성에 반대되는 주장을 펴고 있는 다른 모든 종교체계는 진리일 수 없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설득력이 강하다. 인간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부활은 그분의 신성을 확증한 사건이자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천국 문을 열어준 사건이다. “
 

조덕영박사의 주장
부활의 심판대 앞에 무엇을 의지하고 설 것인가? 부활? 그리스도의 피!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들은 무엇을,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그때도 사람들은 부활을 의지하겠는가? 부활을 소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복된 소망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우롱하듯이 냉소적으로 대하면서까지 부활을 강조하면 안 된다. 인간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존재일 뿐이다. 그때 우리들은 십자가가 아니면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굳이 부활을 강조하려면 오히려 복음, 하나님 나라, 소망, 복 된 소망, 영원한 소망, 산 소망,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같은 더 복되고 포괄적인 용어가 얼마나 많은가. 더구나 부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머 무리하게 그리스도의 이중제사론까지 나아간다면 단번에 드리신(히9:26; 10:10)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각하게 모독하는 아주 위험한 신학이 되는 것이다.
 

이재위목사의 반론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라는 주장은 현재 조박사께서 역사적 부활과 종말론적 부활의 개념을 혼동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은 기독교 변증학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을 증거하는 것이다. 조박사 논평을 분석하면서 박사께서는 부활의 개념부터 먼저 분명하게 정리하시고 다시 토론에 임해 주셔야 할 것 같다. 조박사의 견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이 완전한 속죄가 있다는 것은 백번 동의하며 김성로목사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성로목사는 이중제사를 주장한 적이 없고 속죄와 구속개념의 약간의 혼동이 있었다. 이 부분은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조덕영박사의 주장

네번째, <낯선 신학용어>의 분별없는 사용(일명 ‘이중제사’(?), ‘부활복음’(?), ‘하나님의 피’)은 반드시 신학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김성로 목사는 스스로 기이협의 제언에 대해 자신이 투박한 표현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피’라는 용어 사용은 ‘성부의 십자가’나 ‘성부의 부활’, ‘성자의 열매’, ‘성령의 로고스’처럼 아주 낯설고 이상한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다. 김성로 목사는 삼위일체의 전유(專有, appropriation) 개념을 잘 이해 못하는 듯하다. 더구나 ‘이중제사’, ‘부활복음’ 등의 문제가 현재까지 끊임없이 거론되는 것은 이 문제가 여전히 정리되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재위목사의 반론

조박사께서 부활복음, 하나님의 피에 대한 김성로목사의 표현이 삼위일체의 전유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평가하였다. 삼위일체의 전유(專有, appropriation) 개념은 창조는 성부에게 전유시키고 진리와 지혜와 우주의 질서는 성자에게 전유시키고 선과 사랑과 인간의 성화는 성령에게 전유시키는 것이 보편적 개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전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제2 위격은 실제로 인성을 소유하였지만 성부와 성령은 이 인성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자의 피에 대한 개념은 삼위일체 전유개념에 적용할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삼위일체 appropriation개념이  본 토론에서 거론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주장이다. 조박사께서 무슨 근거로? 김성로목사가 삼위일체 전유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지 객관적인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반론해 주길 바란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신학적인 단어이며 요한복음 서문을 통해서도 예수가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고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을 목격한 도마의 고백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다. 김성로목사가 하나님의 피라고 사용한 이유는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거룩한 희생적 사랑에 대한 확증과 위대한 보배 피임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라고 필자는 이해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피라는 개념을 기독론적 관점으로 볼 때 충분히 무리가 없는 표현이라고 필자는 생각된다.

김성로목사는 하나님의 피라는 개념을 사도행전 20:28 말씀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행 20:28)
 “ποιμαίνειν τὴν ἐκκλησίαν τοῦ θεοῦ, ἣν περιεποιήσατο διὰ τοῦ αἵματος τοῦ ἰδίου.
한글 개역 개정 성경의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에 해당하는 부분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하나님)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 (그)의 교회를 치게 하려고 (NASB, to shepherd the church of God which He purchased with His own blood)'가 된다.

즉 ‘하나님이’로 번역된 ‘투 데우(τοῦ θεοῦ)’는 소유격으로서 ‘교회를’에 해당하는 τὴν ἐκκλησίαν (텐 엑클레시안) 을 수식하므로 ‘하나님의’가 된다. 신약성경에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구절은 여러 구절이 있다. (롬 9:5, 골 1:15, 골 2:9, 딛 2: 13, 히 1:8, 요 1:1,요1:18, 행전 20:28)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나셨으니 그는 만물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롬 9:5)

G. Campbell Morgan 견해에 의하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처럼 하나님이라 표현한 것 자체가 의도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예수께서 존귀하신 제2위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며 죽음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신 것을 상기시키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자기의 것으로 만드신 교회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이러한 표현은 오히려 예수의 대속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희생적 사랑에 대한 확증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피에 대한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목사의 입장이다.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피”라는 표현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전에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한 견해를 먼저 밝히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이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위(位, person)로 존재한다. 따라서 성부는 결코 성자나 성령이 아니며, 성자는 결코 성부나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결코 성부나 성자가 아니나 삼위 하나님의 본질은 같고, 본질적으로 다른 위(位)보다 못하거나 낫거나 하지 않은 하나(一體, unity)이시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과 기능은 다르나 각 위(位)는 동등하시다.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 4, 「예수님은 누구신가」, p.32)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다. 신성(神性)에 있어서는 성부(聖父)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本質)이시며 인성(人性)에 있어서는 우리 사람과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분은 이 두 속성을 가졌으나 상치(相馳)되거나 나누어지지 않고 참되게 연합하고 있는 한 인격체이다. 각 속성의 고유성들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며 두 속성은 함께 구체적인 실체인 한 인격을 형성하며 두 인격으로 분할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사람으로 가장한 하나님이나 신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분은 사람이 된 하나님이다.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 「예수님은 누구신가」, p.39)

  ‘하나님의 피’‘하나님의 죽음’ 이런 표현은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기초한 신앙적 고백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사람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희생과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피’ ‘하나님의 죽음’과 같은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이 물리적인 피를 흘렸다거나 영원하신 하나님이 죽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또한 초대교회 당시 양태론자였던 사벨리우스와 같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주장하는 ‘성부수난설’을 의미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의 하나님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피”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행 20:28)
 
부활복음이라는 용어의 개념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소식이 복음이다.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복음의 기쁜소식(Good News) 인데 왜 부활복음이 비 성경적인 단어이며 신학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용어인지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 즉 부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라는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조덕영박사의 주장

5. 열심보다 중요한 <바른 믿음> 부흥이 전부는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말처럼 마귀도 선한 부흥에 (미숙한 신학을 동원하여) 맞불을 놓는다. 작금의 일부 한국교회가 그렇다. 한국교회는 낯선 신학, 이상한 신학으로 양적 성장을 한 낯선 교회들의 도전 앞에 바른 신앙을 수호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김성로 목사도 자신이 스스로 건전한 교단 소속 목사임을 늘 표명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자신의 신학적 문제에 대해 특정 단체(기이협)가 아닌 한국교회 앞에 문제된 부분에 대한 솔직하고 진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살리는 영이시다. 그리고 목사는 부흥이 아니라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제 미숙한 신학을 계속 고집하지 말고 바른 길로 들어서는 것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일 것이다.
 

이재위목사의 반론

인간의 완전한 구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김성로목사는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개신교 목사 중에 누가 십자가의 대속을 부인하고 무시하겠는가? 반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문제로 제시되었던 부분은 아직 조박사께서 모르고 계시는 것 같은데 언론사를 통해 충분히 해명했다.

조덕영박사는 부흥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하셨는데 조박사께서 이해하시는 부흥은 어떤 개념인가?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의 문제 중에 하나가 춘천한마음교회에서 나타난 외형적인 즉 숫자적인 부흥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필자는 춘천한마음교회 성도들의 숫자에 별로 관심이 없다. 단지 복음을 통해 변화된 성도들의 존재 자체에 관심이 있다. 게임중독, 조직폭력배, 마약중독, 성중독,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았던 불신자들이 복음으로 변화되어 현재 약 700명의 간증자들이 기독교 방송을 통해 간증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을 통해 변화된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삶과 일터에서 복음을 증거하여 작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고 초대교회 같은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왜 숫자를 보는가? 조덕영박사께 권면드린다. 춘천한마음교회 부흥을 단순히 숫자, 외형을 보지 마시고  복음으로 변화된 성도들의 삶과 그들이 전한 복음에 관심을 가져 보기를 권면한다.
 

조덕영 박사의 권면

김성로 목사에게 드리는 마지막 권면은 이것이다. 김성로 목사가 좋아하는 히브리서는 부활복음이 아니라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런즉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라”(히 13:13)고 한다. 그리고 ‘단번에 드리신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부활의 “산 소망”은 결코 없다!
 

이재위목사 반론

조박사의 견해대로 그리스도인이 붙잡아야 할 것이 피 묻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는다. 그리고 성도의 성화론적 측면에서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에 그에게 나아가라”라고 하신 말씀에 깊게 동의한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기록 목적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한 히브리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서신이며,그들로 하여금 핍박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히브리서 8: 1-6 24 신앙을 굳게 지키도록 권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서신이다.
본 서신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우월성 (superiority)을 변증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며,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변증은 곧 성도들이 인내로써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권면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옛 유대교가 지향하던 새 제도의 대제사장으로서,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고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성소 곧 하늘 성소에 부활하심으로 단번에 들어가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리 견디기 힘든 핍박과 유혹이 닥치더라도 온전한 속죄를 받을 수도 없는 불완전한 옛 약속을 부여잡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온전한 속죄와 구원에 이르는 새로운 약속을 믿음 안에서 굳게 잡기를 권면하는 전진적 신앙을 촉구하는 내용임을 볼 수 있다.

김성로목사는 히브리서를 통해 부활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고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성소 곧 하늘 성소에 부활 승천하심으로 단번에 구속의 완성을 이루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조박사의 견해대로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종말론적 부활의 “산 소망”은 결코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사건은 종말론적 부활이 아닌 역사적 부활 승천 사건을 통해 하늘성소에서 완전한 구속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참고로 하늘성소에 단번에 들어간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사역에 있어 완전한 구속을 이룬 성취라고 보는 주석적인 견해이다.

John Murray [조직신학]  십자가 죽음과 하늘성소 입소까지가 단번에 드려진 구속제사의 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은 속죄사역(죄를 위하여 죽으심)이고, 부활은 구속사역의 성취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피는 이미 십자가에서 뿌려진 것이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곧 하늘성소이며, 지상의 성막은 그림자이지만, 하늘성소는 참 실체가 된다.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예수의 피가 바쳐졌는데, 그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하늘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가야만 그 제사가 완성이 된다.
옛 언약의 성막은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 접근과 제한 속죄의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의 완전한 접근과 완전한 속죄로 개혁될 필요가 있었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드디어 새 언약의 중보로 단번에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권성수, 총신대학교출판부, 263쪽)

그는 지상의 장막에서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참조 9:1,7), 하늘의 성소에서(9:11-12,24) 그리한 것이다(9:11-12,24).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께 무제한적인 접근을 제공할 수 있었다(9:14; 참조 10:19-20). 천상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희생과 사역의 효능이 8:1-4에서 주제적으로 먼저 도입된다.(WBC 히브리서-하, p.105)
우리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소나 염소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자신의 피를 들고 하늘에 들어 가셨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단번에 천국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다. (메튜헨리 주석 히 9:12)

'단번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 팍스'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사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매년 반복되는 옛 언약의 구속 사역과는 달리 반복의 가능성이나 필요성이 없음을 시사한다(Morris, Lane). 한편 '성소'는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으로(Hewitt) 본절에서는 지상의 장막이 아닌 하나님의 존전인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Lane, Bruce, Morris)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시사한다(Lane). (호크마주석)

다시 한번 조박사께 발전적인 토론을 위해 권면한다.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은 종말론적 신자의 구원의 관점이 아닌 판네베르크와 스텐리그렌즈교수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증거하는 기독론 관점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한국 기독교 이단 연구단체에서도 김성로목사가 특별히 부활을 강조하지만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고 건강한 교회라고 인정했고 한국 어떤 교단에서도 이단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유독 바른믿음 정이철목사, 림헌원목사, 이창모목사만 자신의 주관적이고 편협적인 성경신학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으며 필자는 바른믿음 정목사의 오류들을 반론했지만 지금까지 신학적인 근거를 가진 객관적인 재 반론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조박사께서 김성로목사의 신학을 논평한 신학자로 책임감을 가지시고 김성로목사가 미숙한 신학인지 아니면 바른신학인지 일차적 자료들을 충분히 정독/검토하고 춘천 한마음교회 성도들에게 일어난 삶의 간증과 변화 그리고 그들의 입술을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원한다.

그리고 정이철목사가 주장하는 내용들이 왜곡 편집된 사실이라면 조박사께서 정확한 근거 없이 김성로목사를 이단으로 매도하고 논평했던 부분에 대해서 신학자의 윤리적 양심으로 김성로목사께 겸손히 사과를 드려야 할 것이다.
신학자로서 얼마든지 비평 할 수 있다. 하지만 조박사의 가장 큰 실수는 신학자로서 기본적인 일차적인 자료가 아닌 일방적으로 비평된 자료를 가지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경솔한 논평자의 기본적 자세의 부재가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필자가 제시한 반론에 대해 왜 악의적으로 왜곡된 수준 낮은 글인지를 근거 없이 무시하지 말고 성경신학적인 관점과 학술적인 근거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답게 객관적으로 반론해주길 부탁한다.

 2017년 1월 17일


애틀랜타 뉴에덴침례교회 이재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