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진리수호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 하는 바른믿음 측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권면의 글

침례교 조직신학자 스탠리 그렌즈교수도 김성로목사의 주장과 비슷하게 부활을 통해 바라본 십자가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한다.

이재위 | 기사입력 2017/01/25 [18:15]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 하는 바른믿음 측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권면의 글

침례교 조직신학자 스탠리 그렌즈교수도 김성로목사의 주장과 비슷하게 부활을 통해 바라본 십자가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한다.
이재위 | 입력 : 2017/01/25 [18:15]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 하는 6가지 이유와 

바른믿음 측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권면의 글

바른믿음 측 김대운목사께서 2017.01.21 바른믿음사이트를 통해 “부활이 변화를 일으킨다' 라는 제목을 통해 김성로 목사의 문제점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르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은 회심의 여부에 있지 부활 강조에 있지 않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회심은 우리가 억지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복음 선포를 통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전적인 주님의 역사에 달려 있다.” 라고 주장한다.

김대운목사의 주장처럼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과 또 바른 복음이 선포를 통해 성령이 역사하신 다는 사실에 필자도 깊이 동의한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한 바른 복음 선포에 있어 왜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는지에 대해 권위 있는 신학자들의 주장과 성경신학 그리고 고든 루이스와 브르스& 데머리스트의 ‘Inrtergrative Theology’를 참고로 논하려고 한다.

첫째,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한 이유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을 분명하게 확증해 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김대운목사는 김목사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비로소 능력있게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라고 표현 하지만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정확한 표현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 분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능력있게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라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이다. 제자들이 성령강림 전에 가롯유다를 대신해서 부활을 전할  맛디아를 세우는 것을 통해 그들은 이미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전 1:22)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자신의 스승을 죽인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각국 방언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 여기서 방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을 통해 제자들이 무엇을 증거했느냐가 중요하다. 베드로의 첫 설교는 예수의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와 주되심과 회개를 통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이었다. (행전 2:36-36) 즉 베드로는 너희가 죽인 예수가 누구인가? 였고 부활을 통해 그분이 그리스도, 주시라는 것을 증거했다. 오순절날 복음선포는 믿는 성도에게 구약에 약속하신 성령 강림의 증거였다. 진정한 성령의 소리는 방언이 아니라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 되심이 터져 나오는 것이 성령의 소리이며 성령의 내주하심의 증거인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가 ‘주’ 라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시인해야 할 신앙고백이었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보다 귀한 신앙 고백은 예수가 ‘주’ (Lord) 라는 고백이었고 믿음의 근거는 예수의 죽음으로 부터의 부활이었다. 인간은 죽음앞에 연약해 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제자들안에 임했던 성령의 내주는 이 만큼 그들의 삶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는 이유이다. (고전 12:3)

즉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부활을 통해 예수가 우리의 참된 그리스도이시며 주재 이심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김성로목사가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한 이유이다. 그래서 한마음공동체는 성령충만을 위해 매일 새벽 2시간을 기도와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이다.

“그들이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행전 5:42)

침례교 조직신학자 그랜즈교수는 기독론의 관점에서 본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는 예수의 자기 인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인 부활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만 예수께서 유일무의한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오직 부활만이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실존을 위한 모범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다.” (스탠리 그랜즈 조직신학 발췌)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죽음 직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부활의 선포가 매우 중요하다는 데 파울 알트하우스의 견해를 같이 한다. 부활은 그 자체로 예수의 신성의 증거이다. ( 밀라도 J. 에릭슨 복음주의 조직신학 기독론에서 발췌)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 사건의 절정이며 그의 부활은 전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유효하게 하는 사건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구속행위들의 긴 과정은 무덤속에서 끝나 버리고 만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확신도 가질수 없다. 죽음은 마지막 말을 가지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이 자신을 생명의 주로 입증하지 않기 때문에 헛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죽었다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최종적이며. 지고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함께 무덤 속에 매장되고 만다. (조직신학 하권 160~174쪽 한국장로교 출판사)

부활 사건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실상 그의 아들의 제사장적 사역에 대해 '아멘'을 공표하신 것이다.(고후1:20) 진정한 구속이 성취되었으며. 따라서 의와 화목과 자유가 죄인들에게 진정으로 주어졌다.(롬4:25) 더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혈과 육에 속한 연약한 인간을 저주와 진노와 모든 악의 공격으로 부터 보호하시고 도리어 견실하게 해주신 사실을 본다. 부활은 그의 왕적 사역을 나타낸다. 부활은 그의 미래의 통치에 대한 약속을 구현시키는 사건이다. (브루스 밀른 조직신학개론 181~183쪽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론을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사건들은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들을 확증할 수 있는 마지막 최고의 증거가 역사적 부활이라는 것을 김성로목사는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사 전체를 통해 기독교 증거를 나타내는 선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부활하셨다” 는 표어는 수세기에 걸쳐 기독교 신앙과 그 증거의 확신을 위해 다시 활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어떻게 기독교적 활동이 시작하였는가? 기독교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믿음에 유일하게 기초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여 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기독교가 분명한 활동을 하게된 기원에 대해 제공하는 유일한 증거는 예수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났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김성로목사는 기독론에 있어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판넨베르크나 침례교 조직신학자 그렌츠교수의 주장처럼 하위 기독론에 의거한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된다.

  1.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주일예배를 실천하고 있다. 예배의 날이 토요일(안식일) 에서 일요일(부활의 날)로 바뀌었다. 이것은 오늘날 부활의 증거로 남아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첫 세기의 어떤 괄목할 만한 사건으로 오랜 세월 고수해 온 안식일 전통이 주일로 바뀌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2.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죽음과 장사 후에 낙심한 제자들이 신약 성경을 기록할 마음이나 동기를 갖을 수 있었을까?
  3. 예수님의 AD와 BC 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역사상 어떤 사건이 훗날 일어난 모든 사건의 연대표시를 바꾼 것을 더 잘 설명하겠는가?

셋째,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부활은 코페르니크스의 전환을 요구하는 창조주가 직접 표적이(Sign) 된 창세 이후의 최고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부활의 증거는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믿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신학과 우주론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바울이 아덴에서 예수와 부활을 전할때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도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고” 라는 반응을 보인 것을 보게 된다.“ 사두개인들은 예수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행전 4: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미련한 것이었다.

 즉 부활이 증거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모든 죄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이 증거되기 때문이며, 십자가의 흘리신 예수의 피는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성자 하나님의 피의 객관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모든 종교를 초토화 시킬 수 있는 기독교 존재의 이유이며 최고의 증거이다.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철학자들에게 변증했던 것처럼 예수의 육체적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심판자 하나님이신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증거” 가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하나님의 승부수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관념을 낳은 것은 제자들의 신앙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물리적인 증거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제자들의 신앙을 낳은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들이는데 그 이유는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보여 주는 증거로 말미암아 확신할 수 있고 성령께서 그 증거를 증언하실 때 우리의 교만과 미온적인 태도를 물리쳐 주기 때문이다. (고든 루이스)

넷째, 김대운목사는 

김성로목사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은 가볍게 여기고 부활을 높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김성로목사가 전하는 부활 복음은 부흥의 좋은 도구가 되는 실용적 가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김대운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부활을 강조했던 사도들이 단순히 부흥의 도구가 되는 실용적인 가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김대운목사의 주장은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다. 결코 김성로목사는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실용적 가치 즉 양적 부흥을 위해서 부활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그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재 조명하는 것은 오직 부활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김성로목사는 자신의 저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바르게 인식하는데 있어 부활의 중요성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 복음의 핵심 사건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다.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롬 6:23 “죄의 삯은 사망”), 반드시 피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히 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다…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은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크거나 중요하다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같이 어느 것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다. ‘피’ 그리고 ‘십자가’ 사건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의 피인가?’와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는가?’이다. … 십자가와 부활은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크거나 중요하다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같이 어느 것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신 것이 확증될 때,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성자 하나님이시며,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3(행 20:28)’인 것이다. 이렇게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예수의 보혈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와 보혈이 어떤 것인지가 재조명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전한 이유인 것이다. 부활의 복음은 결코 십자가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한다.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이 되니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행 20:28)’이며 ‘보배로운 피(벧전 1:19)’인 것이다. (김성로목사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50page 발췌)

침례교 조직신학자 스탠리 그렌즈교수도 김성로목사의 주장과 비슷하게 부활을 통해 바라본 십자가의 의미를 이렇게 기록한다.

“십자가는 부활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있는 계시가 아니다. 성금요일의 십자가는 부활절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부활절의 선포의 눈을 통해서 볼 때 십자가는 전혀 새롭고 경이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수의 부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온전한 인성의 궁극적인 본보기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부활의 확증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하나님의 통치 및 그 통치 하에 있는 삶의 본질에 대한 계시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탠리 그렌즈교수 조직신학 419 page)

김성로목사의 칼럼 중에 부활이 왜 기독교의 심장인지에 대해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과 관련하여 부활의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혈의 능력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보혈은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 (히 9:14). 또한 보혈은 이 세상 임금 마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피이다. (계 12:11). 그리고 보혈은 구원을 얻을 때만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 짓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용서의 피이다. (요일 1:7~9). 그 외에도 보혈에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으며 보혈의 능력이 있는 곳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부활은 기독교의 심장이다. 심장이 튼튼할수록 혈액순환이 잘 되듯이, 부활이 확실할수록 보혈은 그 위력(威力)을 발휘한다. 교회마다 부활로 말미암은 보혈의 능력이 살아서 역사하기를 기도한다.” (2013년 김성로목사 성령행전 칼럼에서 발췌)

다섯째, 인간의 변화는 성령의 내주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성령의 내주하심은  김대운목사의 주장처럼 온전한 복음이 선포될 때만 가능하다고 필자도 믿고 있고 김성로목사께서도 주장하는 것이다.

황승룡교수는 신자의 변화에 있어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제자들이 행위와 예수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어서 이렇게 전격적으로 변화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신약의 대답은 예수께서 죽은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였다는 사실이다. 사실 부활은 초대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였다. 최초로 보도된 기독교 설교는 부활의 사실과 의미를 선포하는 것이었다(행 2:14~36) 만일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구속행위들의 긴 과정은 무덤 속에서 끝나버리고 만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확신도 가질 수 없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 전체적인 본질.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본질을 포함한다. (황승룡교수의 그리스도론 452~456쪽 한국장로회 출판사)

김대운목사는 그런데 오늘날 어떻게 한국교회 가운데 십자가의 대속 죽음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는 부활 복음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일까? 백성들에게 죽임 당한 선지자들은 실패했을까? 이 설교를 하고 죽은 스데반도 실패한 전도자일까? 라고 주장하며 스데반은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했다고 주장하지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이유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서 돌로 칠새 “(행전 7:55-58)

즉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께서 보좌 우편에 서 있다는 것을 외쳤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예수의 부활 승천을 증거한다는 것은 예수가 자신이 주장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며 사두개인들이 예수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했던 이유이다. 그 당시 부활을 증거한다는 의미는 예수의 죽음은 나무에 달린자마다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단지 예수가 신성모독 죄로 죽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생각을 바꾼 사건이다. 즉 인간이 받아야 할 심판을 성자 하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며 예수가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와 동일하다. 즉 바른복음은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주와 그리스도되심을 선포하고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자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확증해 주는 기독교가 세워지게 된  핵심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복음서에는 빠지지 않고 부활의 정황과 사건 내용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사도들이 증언한 초대교회의 핵심 복음인 것을 보게 된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하거늘” (행전 1: 22)

예수를 통해서만이 천국의 가치와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김대운목사의 주장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변화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서철원박사의 주장처럼 바른 복음이 선포 될 때만 가능하며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김성로목사가 단순히 부활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예수의 하나님되심과  십자가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보다 먼저 수반되어야 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누구인가? 즉 부활을 통해 예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사역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는다.

여섯째, 예수의 육체적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이 중요한 이유와 강조되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주장과 그분의 속죄의 타당성은 그분의 부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1985년 리버티 대학에서 예수님이 육체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실인가? 로 무신론자 철학자인 앤서니 플루와 그리스도인 철학자인 게리 하버마스 와 공개적 논쟁으로 번졌다. 이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기사에 대한 문자적 육체적 해석을 플루는 부인하고 하버마스는 인정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문자적으로 부활이 다른 모든 세계 종교와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로서 이론적 및 실천적 중요성이 엄청나게 크다는 데 대해서는 동조했다.

만일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지 아니하셨다면 메시아는 오지 않은 것이고 예수님은 온전하심을 상실했을 것이다. 그분이 자신에 대해 언급하신 주장과 그분이 가르치신 진리를 믿는 믿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 청결사건 후에 유대인들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고 말씀하셨다.(요 2:18-19) 만일 예수님의 참된 권세에 대한 가장 중요한 표징이 없었다면 우리는 심지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를 갖지 못할 것이다. (고든 루이스)

“만일 선지가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이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신 18:22)

그외 성경해석

김성로목사가 증거하는 사도행전 17장 31절에 ‘모든 사람들이 믿을 만한 증거’라는 개념이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다는 표현이 아니라 역사적 부활은 예수가 심판주시라는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된다는 표현이다. 바울이 아덴에서 부활을 증거할때 믿는 사람보다 조롱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하나님이이시라는 최고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전도의 미련한 도를 통해서 증거하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상식의 경험으로 이해 할 수 없지만 예수의 하나님 되심은 역사적인 예수의 육체적 부활만큼 큰 증거는 없다. 그래서 김성로목사는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학자 윌리엄 크레이그의 주장처럼 “발사된 로켓트(사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발사대(정황, 증거)는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성로목사는 믿음은 증거로 믿는 다고 주장하고 있고  사도들의 증언처럼 예수가 하나님이심의 증거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15:3-4)

엡2:8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선물이라.” 본 구절에서 ‘그 은혜’의 개념은 인간에게 베푼 유일한 ‘그 은혜’이다.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즉 하나님이 인간에 베푸신 큰 은혜는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 승천하신 사건을 통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도록 보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가장 큰 은혜임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은혜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말씀을 듣을 때 믿음이 생기고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다. 즉 은혜는 인간의 역사안에 오셔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도록 계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을 통해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체가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며 은혜이다. 물론 믿음에 있어 성령의 역사하심은 당연한 것이다.

결론

김대운목사께서 '부활이 변화를 일으킨다' 라는 제목을 통해 김성로 목사의 문제점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바르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은 회심의 여부에 있지 부활 강조에 있지 않다. 라는 주장은 김성로목사가 강조하는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의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 지지만 복음전도자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며 김성로목사는 복음전도자의 입장에서 사도들이 생명걸고 선포한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의 부활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를 통한 변화는  성령께서 하실 일이며 전도자는 성령께서 역사하는 바른 복음을 선포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복음 전도에 있어 성령의 역사하심의 겸손한 기도가 필요하다.

김대운목사의 견해처럼 사람의 변화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성령의 역사는 바른 복음이 선포될 때 만이 역사한다. 성령의 역사와 복음은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이다. 김성로목사가 부활를 강조하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주’(Lord) 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며, 십자가의 대속의 피가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성자 하나님의 피라는 것을 확증해 주기 때문이다.

부활은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인식적인 역사적 계시이며, 속죄 제사와 그 제사를 성부께서 받아들이신 것에 대한 확증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현재 의롭게 된 데서 오는 평강을 누릴 수 있음을 확증하고 모든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근거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확증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김성로목사의 주장처럼 부활은 교회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심장이다. 심장이 튼튼할 때 십자가의 피가 몸 구속 구속 흘러가 십자가의 사랑, 헌신, 공의, 섬김, 인내등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들이 생명력있게 흘러 넘치리라 믿는다.

김대운목사는 설교자의 전체적인 주장에 대한 의미를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김대운목사께 한가지 권면드린다면 김성로목사의 부흥회 일부분 설교만 듣지 마시고 칼럼,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책자,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 C 채널 간증 20편만 잘 들어 보셔도 김성로목사의 주장을 잘 이해하리라 생각된다. 김성로목사의 월요일 새벽부터 주일 예배까지 목회 현장을 본 적이 있는가? 단순히 부활을 전한다고 사람이 변화되고, 교회가 부흥되고 사람이 몰려든다고 생각하는가? 필자가 본 김성로목사의 부활은 지식적이고 신학적 이전에 그에게 부활은 일평생 생명다해 증거해도 또 증거하고 싶은 기쁜 소식이다.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너무나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 전해도 늘 새로운 그런 기쁜소식 말이다. 이것이 복음(Good News)인 것이다.  사도들이 생명다해 전했던 것은 예수의 부활이었고 육체적 부활을 통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예수가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자랑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와 함께 죽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증거인 것이다. 즉 십자가는 우리의 최고의 자랑이며 부활은 최고의 증거이다. 즉 증거와 믿음은 동일하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는 이유이다. 물론 이 모든 역사위에는 성령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

“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 (행 25:19)

2016년 1월 23일

애틀랜타 뉴에덴침례교회 이재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