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유래간혹 아래 요한복음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가 여호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가 여호와와 동일 인격이라는 내용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과 선재가 야호와와 같다는 동일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이인규
성자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에 대한 유래에 대한 논쟁은 AD 3세기부터 있었다. 그것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성자의 유래에 대한 니케야회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이 성경구절에서 예수님을 “먼저 나신 자”(프로토토코스)라고 언급한 것이 초대교회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프로토토코스”는 “독생자, 초태생”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수는 하나님이 낳은 피조물이라는 주장이었다. AD 300년경, 아리우스 장로라는 사람은 성자가 가장 먼저 태어난 피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낳으시기 전, 즉 성자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성자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 아니고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의 조상이었다고 말하면 이해가 쉽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의미는 예수가 하나님에게로부터 생식적인 방법으로 낳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독생자라는 의미는 God’s Family라는 신성의 의미를 부여하며, 독생자를 의미하는 “모노게네스”라는 단어는 Only begotten son(KJV), One and only son(NIV)으로서 유일성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근동지역의 왕, 로마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는 오래전부터 신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왔다. 알렉산더 감독은 아리우스장로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니케야 회의 초기에 알렉산더 감독이 갑자기 죽음으로서, 서기였고 집사였던 아타나시우스 청년이 황제 앞에서 아리우스 장로와 토론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세력이 막강한 아리우스 장로에 비하여, 청년 집사인 아타나시우스는 토론이 끝나면 귀양을 갔다가, 다음 회의가 시작되면 다시 토론에 참여했다가 귀양을 가는 일을 무려 다섯번을 반복하였는데, 6번째에서는 역전이 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오히려 아리우스가 귀양을 가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니케야 회의로서 그 신조는 다음과 같다. (니케야신조, 325년, 웨인그루뎀 역) 우리는 한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다. 빛으로부터 온 빛이시요, 참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 니케야 신조는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고 말한다. 즉 성자의 유래를 선언한 신조였다. 더욱 많은 신조들은 “출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로부터 나왔다”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파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출생의 의미는 인간과 같은 생식적인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시간적인 순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출생을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한다면 성자가 성부로부터 출생하기 전에는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는데, 성자가 출생한 시간은 영원 전, 만세 전으로서 시간적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자와 성령은 태초부터, 또는 영원 전부터 선재하였다고 말하여야 한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출생하였다는 의미는 출생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시간적인 순서의 의미가 아니고, 논리적인 유래를 말한다. 성부는 스스로 자존했지만,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셨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조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었다고 정의한다. 신조는 시대적인 배경에서 다양한 견해들이 나타났을 때에 그것을 정리하고 요약한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거의 모든 신조는 동일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2) 조직신학적인 근거 그렇다면 조직신학은 이 삼위의 유래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개혁주의 대표적인 신학자 루이스 벌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루이스벌콥 조직신학 상권, 기독교문사, 313쪽) 본체론적 삼위일체에는 명확한 순서가 있다. 인격적 실체에 있어서 성부는 첫째요, 성자는 둘째, 성령은 셋째이다. 이 순서는 어느 인격이 시간이나 논리적 순서에 더 앞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유래의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 그러하다. 성부는 어느 다른 인격에게서 태어나시거나 생기시지 않으시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태어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부터 생기신다. (루이스벌콥, 같은 책, 318쪽) C. 성자의 영원적 생성 : 성자의 인격적 성질(고유성)은 그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시며(간단히 파생이라고 부름) 또한 성부와 함께 성령의 파송에 참여하신다. 성자의 생성(발생)에 대한 교리는 삼위일체의 제1위와 2위가 각각 부자관계를 갖는다는 성경적인 묘사에 의해 암시되고 있다. 성부와 성자라는 명칭이 전자에 의한 후자의 생성을 암시할 뿐 아니라 성자도 역시 반복적으로 독생자라고 불리고 있다. (조석만, 조직신학 상, 대한신대원 출판부, 75쪽) 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인격으로서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분이시다. 아들의 독자성은 아버지로부터 탄생하신 하나님이시며, 독생하신 아들로서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상기 책은 75쪽과 76쪽에서 니케야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8장2항을 인용하면서 아들이 성부로부터 출생하였음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황승룡의 조직신학 상권, 대한예수교장로회 출판국, 192쪽) 삼위일체의 진술 (4) 세 위격의 실체와 사역은 정해진 순서로 표식된다. 위격적 실체에 있어서 성부는 첫째요, 성자는 둘째, 성령은 셋째이다. 이 순서는 어느 위격이 본질적 위엄이나 시간에서 앞선다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만을 뜻한다. 성부는 어느 위격에서 출생하거나 발생하지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 전부터 생기신다. 성부는 생성(generation), 파생(filation)은 성자, 발생(procession)은 성령에게 돌려지는데, 이의 관계는 우리 인간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삼위 안에서만 일어나는 내향적 사역으로서 본체론적 삼위일체 또는 내재적 삼위일체라 한다. 이 속성 상의 동일성은 즉각적으로 한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성자가 성부의 정확한 본성과 본질이며 모든 면에서 성부와 같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 위격을 다른 위격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학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기독교신학은 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대답은 성자는 그가 아들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성부와 구별된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낳아짐 또는 태어나심에 의해서 성부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를 들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로 대표되는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취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명칭들은 신성에 공통된다. 그러나 무기원자의 고유명칭은 성부이며, 무기원적으로 태어나신 바 된 자의 고유명칭은 성자이며, 태어나지도 않고 나오시는 자의 고유명칭은 성령이다. (그리스도의 위격, IVP, 도널그 맥클라우드, 185쪽)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서 다른 많은 것들이 그랬듯이,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세련되게 표현했다.... 성부는 원인도 없으며,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는 아무 것에게서도 도출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이끌어낸다. 그는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단 하나의 성질도 끌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자는 낳는 방식으로 성부로부터 이끌어져 나왔으며,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부에게서, 낳는 방식이 아니라 나오는 방식으로 이끌어져 나왔다.... 그러므로 이 휘포스타시스적인 혹은 위격적인 특성들 가운데서만 세 거룩한 존속은 서로 다르며, 본질상으로는 분리될 수 없으나 그들의 고유하며 특유한 존속의 구별되는 표지에 의해서 다르다. (그리스도의 위격, IVP, 도널그 맥클라우드, 184쪽) 성부는 아무 것에서도 유래되지 않았으며, 스스로에게서 자기의 존재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신이 분명하고 자연적인 방식으로 만물의 존재의 시작과 원인이시다. 그러나 성자는 나심의 방식으로 성부에게서 유래하며, 마찬가지로 성령도 나심의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나오심의 방식을 따라서 성부에게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성자와 성령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그들의 존재 자체까지도 성부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성부가 계시지 않는다면, 성자도 없으며, 성령도 없다. (그리스도의 위격, IVP, 도널그 맥클라우드, 193-194쪽) 대부분의 간략한 조직신학 서적은 예수의 유래와 기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언급하는 전문성이 있는 신학서적은 모두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책 외에도 여러 책을 찾아볼 수 있지만,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아래의 제럴드브레이의 신론이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갑바도기아 신학에서 세 휘포스타시스는 그들의 기원상의 양식에 따라 다음과 같은 구별로 특징되어진다. 성부는 무출생적이다(unbegotten) 성자는 성부로부터 출생(begotten)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proceed) .... 다른 한편으로 성자는 성부하나님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다. 성부는 영원 속에서 성자를 낳았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러한 영원 속에서의 낳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안다고 고백하지 않았으며,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아리우스 주의적 믿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영원 출생의 과정은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그 출생은 발생했으며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를 결정지었다. (신론, IVP, 제럴드 브레이, 188-189쪽) 삼신론이란 무엇인가? 삼신론은 본질도 셋, 인격도 셋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로서, 삼신론은 각각 독립적인 세 신성의 복수성을 주장하며, 세분의 하나님이 각자 독립적으로 생성되었다는 주장이다. 삼신론에서 삼위일체란 동등하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세 존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세 존재는 각각 신적이라고 가르친다. 삼신론은 신성의 복수성을 강조한다 (마크 드리스콜, 기독교교리, 부흥과 개벽, 49-50쪽) (3) 신앙고백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신조 그렇다면 또 다른 신조들을 살펴보자. 다음의 신조는 사도신경과 함께 카톨릭뿐만이 아니라 동방정교, 개신교에서도 공식적으로 믿음의 고백으로 인정하고 있다. 모두 성자의 유래를 성부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아타나시우스 신조 일부, 이정석 역) 성부는 타자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피조되거나 출생되지 않았다. 성자는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오로지 성부에 의해 출생되었다.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피조되지 않았지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세 아버지가 아니라 한 아버지가 있으며, 세 아들이 아니라 한 아들이 있으며,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이 있다. (니케야신조, 웨인그루뎀) 325년 우리는 한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이시다. 빛으로부터 온 빛이시요, 참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 (니케야 콘스탄틴노플 신조, 이정석 역) 381년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한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영원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신중의 신이며 빛중의 빛이고 참 신중의 참 신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었으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신 분입니다. (칼케톤 신조, 이정석 역) 거룩한 교부를 따라, 우리는 일치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의 동일한 아들이며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여 참 신이며,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진 참 인간이다. 신성으로는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본질이 동일하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되, 죄는 없으시다'. 신성으로는 창세 전에 성부로부터 출생하였고, 인성으로는 이 마지막 때에 우리와 우리 구원을 위하여 신의 수태자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다. (4)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조 역사적으로 신앙고백과 신조가 되었던 것들을 살펴보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이 되는 웨스민스터 신조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웨스트민스터의 내용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조, 웨인그루뎀 역) 웨스트민스터 제2장 3. 하나님은 우일무이하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공유하시고 계시는 3 위격이시다. 즉 하나님아버지는 그 누구로부터 태어나셨거나 그 누구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성자는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탄생하셨고, 성령은 영원 전에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유래하셨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 문 9번-10번, 1647) 하나님의 신성에는 세 위가 계십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십니다. 이 세위는 비록 각 위의 고유한 품성과 구별되시지만 참되시고 영원하신 한 하나님이시며 본질이 같고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성부는 성자를 낳으셨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심을 말합니다. (5) 교단의 교리적 입장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도 4가지 신조를 기독교 신앙으로 고백함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모든 개신교의 모든 교단은 최소한 4가지의 신조를 공인한다. (감리교 교리와 장정, 제 2장 교리, 제 1절 신앙과 교리의 유산) 14. 기독교대한 감리회는 모든 개신교인들의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함께 고백한다. 이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를 두었으며,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고대교회는 성경을 거룩한 정경으로 확정하고, 니케야(325년), 콘스탄티노플(381년), 칼케톤(451년) 신조들과 사도신경을 기독교 신앙의 표준으로 확립했다. 이는 복음의 본질을 선포하고 기독교 교리의 정통성을 보존하려는 교회의 노력이었다. 심지어 캘빈이 초안한 프랑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도 동일하다 (캘빈이 초안한 프랑스개혁주의 신앙고백서) 아버지는 제1원인이 되고, 원칙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 아들은 그의 말씀이요 영원한 지혜다. 성령의 그의 덕행과 능력과 효력이다. 아들은 영원 전에 아버지에 의해서 태어났다. 성령은 영원토록 두 분에게서 출원한다.(이종성의 삼위일체, 114쪽) 다음은 성공회와 예장통합교단의 신조와 신앙고백서이다 (성공회신조 제2조 사람이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 아버지의 말씀이신 성자가 영원에서 참된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셔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으며, 축복된 처녀 마리아의 태 내에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여서 그녀의 본질을 타고 태어났다 (통합측 신앙고백서, 1986)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삼위는 서로 혼돈되거나 혼합할 수 없고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다. 삼위는 그 신성과 능력과 존재와 서열과 영광에 있어 완전히 동등하시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요1:14,18)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6) 수많은 신앙고백서와 신조들 신학서적도 그 내용이 동일하고, 신조들도 그 내용이 동일하다. 과연 어느 누가 이 모든 신조의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고 가르친다. 같은 무한하시고 한분인 분할할 수 없는 하나님이 위격 안에서 불가분리적으로 또한 혼돈이 없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구분된다. 아버지는 영원부터 아들을 낳으셨다. 아들은 표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탄생했다. 그리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영원부터 출원했다(같은 책, 119쪽)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 영원하시고 측량할 수 없으며 불변하시며 이해를 초월하시는 무한하시고 오류가 없으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로 계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며 당당하게 고백한다. 세분이시나 한 본질이시고 한 실체요 한 본성이신 하나님이시다. 아무에게서도 나오시지 않으시는 아버지, 오직 아버지에게서 나신 아들, 두 분에게서 나오시는 성령께서는 영원히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 낳으시는 아버지(begetting), 탄생하신 아들(begotten), 나오시는 성령(proceeding)께서는 한 본질이 동일하시고 동등하시며 전능하시며 영원하시다. (프랑스 신앙고백, 1559년)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단순하시며 거룩하신 본질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분이 계심을 가르친다. 아버지는 제 일 원인이시오 만물의 시초이시며 원인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하신 말씀이시오 영원하신 지혜이시며 성령은 아버지의 능력이시오 권능이시고 효능이시다. 아들은 영원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고 성령은 영원전부터 아버지와 아들 두 분에게서 나오신다. (벨기에 신앙고백, 1561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신성에 따라 하나님의 독생자 이심을 믿는다. 영원부터 탄생하셨고 지음을 받지 않으셨으나(만일 그렇다면 그는 피조물일 것이다)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시며 동일하게 영원하시며 바로 아버지의 위격의 형상을 가지셨으니 아버지의 영광의 찬란함이 모든 면에서 아들에게서도 동등하시다. 7) 성령 성자뿐 아니라 성령도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는 언급이 모든 신조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조직신학적으로는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령은 발출되었다(또는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과 예수의 영과 성령이 동일한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아들의 영이라는 것은 곧 성령이 성부와 성저에게서 발출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 = 예수의 영 = 성령) 롬 8:9-11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행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성경적인 근거 그렇다면 신조가 아닌 성경을 살펴보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절은 수없이 많으므로 일일이 인용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는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구약성경에서는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졌으나, 천사들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낳았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9) I am 간혹 아래 요한복음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가 여호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가 여호와와 동일 인격이라는 내용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과 선재가 야호와와 같다는 동일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 하시니 신약에 나오는 요 8:56-58의 구절에서 I am은 예수의 선재성과 함께, 신성 즉 예수가 시간을 초월하는 신성을 말하는 것이며, 예수가 여호와와 동일한 인격이라는 내용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재를 말하려고 하셨다면, I was라는 과거시제를 사용하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 구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있지만, 만약 예수님이 선재만을 표현했다면 동사는 과거 시제이어야만 한다. 예수님이 현재동사의 시제인 I am을 사용하신 이유에 대해서 대부분의 성경주석들은 예수님이 시간을 초월하는 신성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 그는 초역사적인 인격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8:57)고 하셨다. 여기 이른바,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 원어는 현재동사로 (I am)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다는 뜻이 아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존재는 늘 현재란 뜻이다. 비켄하우젤은, 여기 "내가 있느니라"고 한 말씀에서 그의 존재가 어느 역사적 시간에든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고 하였다. (호크마주석)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즉 예수님이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선재의 의미만을 표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명한 성경학자인 Barret는 이것을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여호와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어떤 주석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 이 표현(요8:57)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하신 말씀과 놀라운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구절을 암시하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C.K.Barret) -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선재(요1:1)를 명백히 밝히셨다. 특히 내가 있었다가 아니라 내가 있다(헬: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영원한 자존자 또는 현존자이심을 계시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는 말씀과 대등한 권위를 갖는다.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대담한 예수의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여 돌로 치려했다(톰슨주석) - 아브 \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 예수님의 신성을 선언하는 탁월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 더 나아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 헬라원문은 태어나다의 과거형을 있느니라 의 현재성을 써서 구별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시간적으로 유한한 존재임에 비하여,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계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내가 있느니라 : 이 말은 헬라어로 8:24, 28의 “내가 그이다”와 똑같으며 어원적으로는 히브리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와도 같은 말이다. (영어는 I am that I am 으로 번역, 우리 말은 그 뜻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곧 이 말은 하나님의 자기 칭호이며, 신성의 표현인 것이다.(오픈주석) -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 주님께서는 이 표현을 통하여 위대한 자존자(I AM)로서의 그의 신성과 영존성을 주장하셨는데, 그것은 과거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를 사용했다는 점, 그가 아브라함을 보았는가라고 질문한 유대인들에 대한 답변 안에 이 말씀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 말을 듣고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할 정도로 격노한 무리들이 그것을 이해했다는 점 등을 볼 때 명백한 것 같다. 고대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족장들이나 심지어 천사들보다 뛰어나며 그들 모두의 주(主)이심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적 본질은 창조 이전에 함께 존재했던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창조는 그의 사역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다. (에메트 주해성서대전) - “8:58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비웃음의 의미까지 내포한 체 던진 57장의 질문에 대해서 본절에서 예수는 더욱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셨다. 자신의 선재에 관하여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선언의 중요성은 예수께서 자신의 신적권위를 나타내며 중요한 영적 진리를 선포하실 때 주로 사용하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문구가 사용된 것에서 알 수 있다. 한편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이 존재하였다는 주장은 요한이 이 복음서의 서두에서 강조한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에 대한 신학적인 주제와 관련된다. 그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정체를 나타낼 때, 그리고 신적본질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한 “에고 에이미”라는 양식의 진술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과 선재성을 동시에 명백하게 나타내셨다. (옥스퍼드 주석) 이 성경구절을 통하여 예수가 여호와와 동일한 인격임을 말하는 사람들은 단일신론자들과 양태론자들이었다. 거의 모든 주석은 예수와 여호와의 인격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신성의 동일성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출 3:14에 대해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 구절의 NIV 영어성경은 I am who I am 인데, NIV는 I am that I am으로 번역했다. 다음은 한글 번역성경인데 번역상 많은 차이점이 있다. [개역성경]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공동번역]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현대인의성경]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하고 말해 주어라." 출 3:14에 대해서 여호와란 단어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있어왔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시나무 떨기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에,"I am who I am"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하야"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하야는 "이다"(be) 또는 "되다"(become)의 축어 형태로 본다. 또 수많은 사람을 의미하는 단축형 명사 "야"(Yah) 혹은 "야후"(Yahu)라는 단어가 이사야, 느헤미야, 예레미야등에서 표기되는 것으로 보아서 "야웨”라는 말에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어지기도 하며, 할렐루야의 마지막 단어가 “야”라는 것도 “여호와를 찬양하다”라는 의미이다. 10) I am who I am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I am who I am 이라는 단어에 대해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있다. (참고: 주제별로 본 구약신학, 윌리엄다이어네스) 칼바르트 : 칼바르트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하나님의 특정한 이름을 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맡기는 것(delivering over)을 뜻하는데, 이러한 일은 심지어 계시라고 할지라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의 계시로 간주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자신의 계시는 숨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모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상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하려는 자유로운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신다는 증거를 사사기13:18로 예를 든다. “어찌하여 이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이니라” 즉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서 묻자, 하나님은 그 질문에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하기 위하여 I am who I am 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70인역 : 70인역에는 “나는 존재하는 일자(一者)이니라”(I am the one who is)라고 번역되어있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해석이다. 즉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이시며 실존과 본질이 동일하신 분이시며, 항상 존재하시는(is) 분이시다. 이러한 해석은 카톨릭의 신학자인 에첸 질송, 마스칼등이 주장한 견해인데, 이에 대한 신학적인 주장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가 많으며, 원래 70인역 자체의 번역이 항상 정확하지만은 않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단순한 히브리 사람들에게 너무 고차원적이며 추상적인 철학적인 자신을 전달하시려고 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비평이 있다. 울브라이트 : 울브라이트는 어원학을 근거로 하여 매우 흥미있는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He who cause to be"(존재케 하시는 분)이라는 창조적 개념, 원인적 개념에서 계시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프리즌 : 프리즌의 견해는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라는 견해인데, "I will be there, as I am here"(내가 여기에 있는 것처럼 내가 거기에도 있을 것이다) 혹은 “I am here for you"(나는 너를 위하여 여기에 있다)로 해석한다는 견해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가 애굽에서 인도하느냐고 그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여야 하느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3:13,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앞으로 약속의 보증이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계속 관계를 맺는 주며, 계속적인 예배의 방편이 되어질 것이다. <저작권자 ⓒ 목회와진리수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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