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진리수호

지방교회 이단성 연구보고서

우린하나님이되리라 걸러다니는 하나님?

목회와진리수호 | 기사입력 2024/06/12 [12:31]

지방교회 이단성 연구보고서

우린하나님이되리라 걸러다니는 하나님?
목회와진리수호 | 입력 : 2024/06/12 [12:31]

 

 

                    지방교회의 이단성 연구보고서

 

 

                                                                                                                  이 인규

 

1. 서론

2. 지방교회의 개요

3. 지방교회의 교리 개요

4. 지방교회의 배타적인 교회론

5. 지방교회의 중요한 이단적 교리

6. 지방교회의 신인합일론

 

1. 서론

 

최삼경목사와 지방교회가 월간지 [교회와 신앙]에서 지상토론을 한 후에, 지방교회 교인들이 [교회와 신앙]의 홈페이지에 단체로 몰려와 최삼경목사를 비난하는 글을 올리며 토론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교회와 신앙] 측은 필자에게 지방교회와 공식토론을 제안하게 되었고, 필자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2001년 7월말부터 11월초까지 [교회와 신앙]의 홈페이지에서 지방교회의 대표 토론자 김모씨와 일대일의 공식토론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약 3개월 후에 토론이 아직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방교회는 일방적으로 토론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며 토론을 사실상 포기하는 일이 있었다.

 

그 후에 장관섭목사가 운영하는 개혁연구소(리폼드) 홈페이지에서도 지방교회 자료에 대해서 불만을 품은 지방교회가 단체로 몰려 들어온 일이 있었으며, 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약 1달간 비공식적인 토론을 한 적이 있었으며, 갑자기 일제히 토론을 중단하며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마치 어느 조직이나 지시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닉네임을 사용하지만, 단체로 몰려와 지방교회의 글을 올리고 토론을 요청하는 자들은 10명 안밖의 인물로 주로 지방교회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자들이다.

 

그 외에도 십 수년전, 필자는 하이텔 컴퓨터선교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대구교회(이현래)라는 곳과 오랫동안 토론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지방교회와 매우 유사한 곳이다. 필자는 그들에 대해서 이단연구기관에 제보를 했고, 결국 그들은 2005년 한기총에 의하여 이단으로 발표되었다.

 

필자는 수차례 지방교회와 토론을 한 경험을 통하여, 지방교회의 이단성을 정리한 연구 보고서 자료들을 필자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와 홈페이지에 정리하여 놓았으며, 이단을 연구하는 목사들이 지방교회에 대한 자료를 요청할 때마다 계속적으로 자료를 제공하여 왔다. 그 후로 지방교회는 필자에 대한 비난성 글을 계속 인터넷에 올려 놓고 “이인규권사와 최삼경목사는 삼신론자이다”라는 맹비난을 하였는데, 공식토론조차 기권한 사람들이 장외에서 비난하는 것은 진정한 태도가 아니며, 그 내용도 역시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거짓 조작과 변명에 불과한 내용일 뿐이다. 또한 양태론적인 시각에서 보면 정통삼위일체는 당연히 삼신론으로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2010년 6월10일에 미국 지방교회 지도자들이 방한하여 기자간담회를 자청하여 자신들은 복음주의에 충실한 곳이며, 한국교계에게 지방교회에 대해서 재평가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또 무엇이 잘못인지에 대해서 충고를 하여 주면 겸허하게 수정하겠다고 한기총 회장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2009년과 2010년 한기총 이대위는 지방교회에 대해서 이단성조사를 계속 공전시키고 있었다.

또한 지방교회는 미국에서 있었던 명예훼손에 관한 법정소송을 이용하여 “미국의 어느 출판사가 자신을 이단이라고 발표하였다가 명예훼손으로 벌금을 냈다”고 선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법정은 어느 단체나 교회가 이단인가 아닌가를 판결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명예훼손 소송이었을 뿐이다. 또 몇년전 지방교회는 풀러신학교 리챠드 무어 학장이 지방교회를 이단이 아니라고 평가하였다는 선전을 하기도 한 바 있었는데, 풀러신학교의 무어 학장은 몰몬교가 이단이 아니라고 몰몬교에게 사과를 한 친이단인사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즉 친이단성향을 가진 인사를 앞세워 자신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조작하는 케케묵은 수법으로서, 최근의 몇몇 이단들이 사용하는 수법과 동일하며,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가증스러운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지방교회는 건전한 종교 단체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내적으로 스스로 기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사탄이 세운 왕국이며 음녀라고 갖은 욕설로 비판하기 때문이다(3페이지 4번 항목, 참고). 지방교회는 대외적으로 말할 때에는 자신들이 정통기독교와 동일한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마치 오해에서 비롯된 것처럼 조작하는 비양심적인 이단 단체이다. 즉 대내적인 가르침과 대외적인 주장이 다른 이러한 이중적인 성향을 가진 이단들이 너무 많으며, 그들의 위장에 넘어가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지방교회의 이단성에 대해서 다시 보고서를 정리하여 올리고자 한다.

 

지방교회의 정체에 대해서 그 실상을 파악하는 이단연구가들은 우리나라에 얼마 되지 않는다. 그들의 교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책을 많이 읽고 깊은 연구를 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며, 전문적인 신학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단들보다 더욱 위험하다.

 

지방교회는 베뢰아(김기동), 구원파(권신찬, 이요한, 박옥수), 다락방(류광수), 대구교회(이현래)등에 영향을 미쳤으며, 더욱이 최근에는 지방교회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주종철(주안교회), 조종성(복음중앙교회), 조중연(예수생명교회), 김상배(한나라교회) 같은 곳들이 많이 나타났다.

심지어 지방교회 세미나에서 참가하여 축사와 격려사를 해 준 친이단성향의 목사들(예영수목사, 강춘오목사, 김경직목사)도 많이 있으므로 특히 주의하여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방교회는 단순한 이단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면서, 대내적으로는 기독교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부정하는 심각한 이단으로서 그들에게 미혹되어서 지방교회를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목사들이 나온다는 자체가 매우 위험한 것이며, 우리는 지방교회의 정체를 똑바로 직시하여야만 한다.

 

2. 지방교회의 개요

  

지방교회의 창시자는 중국의 워치만 니(1903-1972)이다. 그는 세대주의로 유명한 존 다비와 엔드류 머레이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워치만 니는 경건운동(Little Flock Movement)이라는 작은 단위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21세의 나이로 사역을 시작한지 17년 만에 700여개의 교회와 70,000명의 교인으로 부흥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작은 단위의 성경공부 모임은 아주 효과가 있으며 최근에 신천지가 전파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1952년 체포되어 1972년 사망까지 투옥되었으며, 그 이후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1905-1997)가 계승하게 되었다. 그동안 워치만 니의 책이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어 있었고, 그의 좋은 점들만 부각되어 전달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워치만 니는 이단이 아니라는 견해가 많이 있지만, 워치만 니의 사상에도 소위 삼일론이라고 불리는 양태론, 공간적인 장소개념으로 분리시킨 삼분법적인 인간론, 배타적인 교회론, 단체 구원론등에서 심각한 문제점들이 발견되므로 그도 이단성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위트니스 리가 워치만 니의 사상을 더욱 변질시켰다는 주장은 분명하지만, 위트니스 리의 사상이 곧 워치만 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며, 많은 목격자들은 그들의 관계가 마치 부자지간과 같았다고 평가한다는 점에서 워치만 니도 문제가 없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특히 풍유적인 성경해석, 노골적인 신인합일론, 종말론등의 위트니스 리의 사상은 오늘날 지방교회의 교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의 투옥으로 대만에서 사역을 하다가 미국 서부지역에서 사역을 하였으며, 워치만 니의 또다른 계승자인 스티븐 강은 위트니스 리의 변질을 비난하면서 미국 동부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익현(왕중생)이라는 사람이 지방교회를 처음으로 전파하였으나 처음에는 위트니스 리와는 단절하고 있었으며, 왕익현 사망 이후에야 1980년부터 한국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3. 지방교회의 교리 개요

 

(1) 지방교회의 이단적인 교리는 다음과 같다. 거의 모든 신학적인 견해에서 이단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면 명백하다.

 

신론 : 양태론(삼일론), 조작된 경륜적 삼위일체(사역적삼위일체)와 상호내재적 삼위일체

기독론 : 아폴로내리우스 주의(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

인간론 : 영과 혼과 육을 공간적, 장소적으로 분리하는 3분법, 이원론

구원론 : 신화사상(신인합일론), 단체구원론

성경론 :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해석을 추종, 계시, 비밀, 풍유적 해석.

종말론 : 내세 부정, 극단적 세대주의

교회론 : 배타적, 부정적 교회론

  

(2) 지방교회의 가장 중요한 세가지의 이단적 교리

 

지방교회 교리에서 이단성은 거의 전반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세가지이다. 이 세가지의 정확히 교리를 파악하면 지방교회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➀ 신론(양태론, 승계론)

➁ 기독론(신성과 인성을 분리시키는 아폴로내리우스 주의)

➂ 인간론(영과 혼과 육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 이원론)

 

지방교회는 대부분 신론에서만 양태론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다. 지방교회는 기독론에서도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키는 심각한 이단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인간론에서도 영과 혼과 육이라는 세 개의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이원론적인 이단성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가지의 개념을 반드시 이해하여야만, 지방교회가 말하는 신화사상, 소위 신인합일론이라는 것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뒤에 “지방교회의 중요한 이단적 교리”이라는 5번 항목에서 이 세가지 교리를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4. 지방교회의 교회론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이 기독교와 다르다는 주장과 기독교는 사탄이 세운 종교라는 배타적인 주장을 한다. 아래의 지방교회의 배타적인 교회론을 읽어 본다면, 그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동일한 복음주의라고 주장하든지, 오해라고 변명하는 것은 모두 거짓 조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요 교리에서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듯이, 이들의 교리는 기독교의 교리와 전혀 다르며, 이들은 자신들을 포함한 극소수만이 이 교리(God-man)를 알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이 문제를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9쪽)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사람이심을 시인한다. 또 이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53쪽)

 

- 마찬가지로 교회 시대에서 그분은 이러한 이기는 무리들을 기독교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 분은 오직 그분의 회복 안에서 소수의 이기는 자들을 찾아낼 수 있다. 계시록 14장은 비록 많은 이들이 구원받았지만 이기는 자들은 다만 144,000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67쪽)

 

-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삼일하나님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삼일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분재하심의 실제이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비밀. 24쪽)

 

기독교에 속지 말자. 기독교에는 숱한 허사가 많고 특히 교회는 그렇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거의 실제적이지 못하다. 신약계시에 따르면 교회, 그리스도의 몸은 지역[지방]교회 로서 표출된다. 내게 지방교회가 없으면 내 교회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교회는 지방교회 안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미국 지방교회 홈페이지 내용)

 

지방교회는 자신들만이 유일한 참 교회라는 차별성과 배타성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를 거짓, 사탄, 바벨론, 음녀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여 지방교회가 복음주의에 충실한 곳이라면 기독교는 사탄이 세운 교회가 됨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가라지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큰 나무는 오늘날의 기독교계를 의미한다. 누룩은 이교도의 모든 관습, 세상적인 것, 죄있는 것, 우상숭배를 의미한다. 여자는 로마 천주교, 심지어 기독교계까지도 의미하며, 악한 자는 사단 자신이다. (위트니스 리, 왕국, 265쪽)

 

- 음녀들의 어미는 변절한 교회이므로 그 여자의 딸들인 그 음녀들은 어느 정도 변절한 로마 천주교의 가르침과 실행들과 전통을 붙잡고 있는 기독교 안의 모든 각종 종파들과 단체들 임에 틀림없다. 순수한 교회생활에는 변절한 교회로부터 전수한 악이 전혀 없다.(위트니스 리, 교회 391쪽)

 

- 참된 지방교회들은 순수한 금등대들인 데 반하여,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 교파들과 독립단체들을 포함하는 오늘날의 기독교계는 완전히 순수성을 잃은 큰 혼합물이다. 이 혼합물이 큰 바벨론을 구성한다.(위트니스 리, 교회 390쪽)

 

- 계시록 17장4절과 5절에서 우리는 변절한 기독교계의 참 상황을 본다. 밖의 모습은 단지 전시일 뿐이다. 내적으로 변절한 기독교계는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들로 가득 차있다. 그 여자는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극도로 불결하다. 이것이 곧 교회의 타락의 최종완성이다.(위트니스 리, 교회 391쪽)

  

기독교를 사탄이라고 정의하는 지방교회에서, 한기총과 교단의 이대위에게 자신들을 재평가하여 달라고 요청한다는 자체가 웃을 수 없는 코메디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탄이며 음녀라고 부르는 기독교에 자신들도 동일한 복음주의 사상을 갖고 있으므로, 자신들을 재평가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뒤로 돌아서면 즉시로 웃음을 보이며 그들의 긴 혀를 낼름 거릴 것이다.

 

5. 지방교회의 중요한 이단적인 교리  

 

필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지방교회의 이단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가지는 다음과 같다. 이 세가지 교리는 오직 한가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즉 “예수그리스도는 God-man의 첫 샘플이며, 지방교회 교인도 그와 똑같은 God-man이 될 수 있다” 라는 공식을 맞추기 위하여 모든 것을 전개시키고 있다. 즉 지방교회 교인에게 그 영(그들은 성령이라고 하지 않는다)이 들어온다면 그들은 예수와 똑같이 되는 것이며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그 영’은 성령이 아니며, 그 영은 과정과 단계를 거친 양태론적인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1) 신론 : 양태론

2) 기독론 : 아폴로내리우스적인 기독론으로서 신성과 인성을 분리

3) 인간론 : 영. 혼. 육을 세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이원론

 

이 세가지의 교리가 신인합일론을 만들게 된다.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이 세가지 교리를 충분히 파악한다면, 지방교회가 과연 어떤 곳인지 여러분들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니다. 지방교회가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그도 역시 이단과 동일한 사상을 갖고 있거나, 지방교회에 대해서 지식이 전무(全無)한 사람일 것이다. 만일 두가지가 다 해당이 안된다면, 그는 어떤 댓가를 위한 고의적인 목적으로 지방교회가 이단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지방교회는 다른 이단들과 동일한 수법을 사용하는데, 자신들의 교리를 성경적으로 짜깁기를 하기 위하여, 그들이 필요한 부분적인 성경만을 선택하여 인용한다.

 

과연 그들의 변명과 같이 그들은 삼위일체가 양태론이 아닐까? 그들의 신론은 명백한 양태론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또한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 또한 초대교회의 어거스틴과 갑바도기아 교부들도 자신들과 같은 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이러한 고전적삼위일체의 배경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들의 주장은 모두 거짓 조작과 위장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설명할 교리는 양태론이며, 지방교회가 양태론을 주장한다는 명백한 증거와 함께,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소위 경륜적삼위일체와 상호내재론, 고전적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할 것이다.

 

1) 신론

 

➀ 양태론(Modalism)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하나님 297쪽)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삼위를 물과 얼음과 수증기의 세가지 양태로 보는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가지의 세 단계’ 혹은 ‘한 하나님의 세 방면’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55-56쪽).

 

- 왜 그 분의 경륜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세 인격들이 필요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분의 하나님이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하나님 363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290쪽)

 

지방교회의 책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전형적인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성자 예수로 오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으로 왔다는 세 과정과 세 단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한 인격을 말하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읽고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학적으로 매우 무지한 사람일 것이다.

   

-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더욱이 위트니스 리는 정통기독교가 가르치는 삼위일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을 하고 있다. 그는 정통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와 정통적인 가르침과 해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을 한다.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287쪽)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쪽)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 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성령42쪽)

 

아래 글을 보면 지방교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노골적으로 반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태론의 시각으로 볼 때에 정통삼위일체는 삼신론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초석이 된 니케야신조까지 부정을 한다.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439쪽)

 

지방교회의 주장은 명백한 양태론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정통삼위일체는 본질(우시아, essence)로는 한분이시지만, 인격(페르소나, person)으로는 셋으로서 서로 구별이 되며 상호교류가 가능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한 인격과 한 실제를 주장하며, 한 인격이 세 과정과 세 단계를 거친다고 주장한다.

 

➁ 상호내재 (페리코레시스, co-inherence of the persons)

 

지방교회는 누가 보아도 양태론인데,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 이유가 자신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개념을 잘 모른다면, 그들에게 오히려 말려 들어가게 되며,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정통삼위일체이라고 주장하며, 토론을 하는 상대방을 삼신론으로 뒤집어 씌우는 작전을 구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상호내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 삼위 양식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영원하지는 않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삼위양식론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오심으로 끝났고 아들은 그 영의 오심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37-38쪽)

 

즉 양태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삼위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지만, 자신들은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고 상호내재한다고 가르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캘빈의 시대에도 세르베투스라는 양태론자가 있었다. 그가 주장한 내용이 바로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메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베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IVP, 234쪽)

 

앞에서 충분히 검토한 바와 같이 지방교회는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으로 육신을 입고 왔으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의 세 과정, 세 단계를 거쳤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세 과정과 세 단계의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한다고 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주장은 웃을 수도 없는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대학시절의 “나”가 있었고, 그 후에 “나”는 학교를 졸업을 하여 회사에 취직하여 사원으로 근무하였고, 그 후에 “나”는 교회에서 이단연구를 하게 되는 과정과 단계를 거쳤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 대학생이었던 “나”와 회사에서 근무했던 “나”와 이단연구를 하는 “내”가, 지금의 “나”라고 하는 사람 안에 상호내재하고 동시존재한다면 하면,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라고 불리는 세 사람이 과연 인격적으로 하나인가? 셋인가? 과연 그 셋이 서로 상호교류가 되고 셋이 구별될 수 있는가? 대학시절의 “나”와 회사에서 근무했던 “나”와 이단연구를 하는 “나”의 셋이서 상호교류를 할 수 있으며, 서로 구별이 되는가? 그 셋이 내 안에 상호내재 한다고 하여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삼중적인 개념의 도입이 양태론이 아니라는 변명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당당한 이단이 되는 것이 낫지 않는가? 성경을 보면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파송한다.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분리되지 않지만, 인격적으로는 분리되어야만 한다. 만일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삼위의 파송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의 황당한 주장을 들어 보면 양태론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14장26절에 의하면 삼일성의 첫 번째가 세 번째를 보내셨다. 그러나 세 번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두 번째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15장26절에 의하면,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번째에 의해서도 보내심을 받았다. 세 번째가 오셨을 때 그분은 두 번째로 첫 번째와 함께 오셨다. 하나가 보내심을 받을 때에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가 올 때 모두가 오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190쪽)

 

그렇다면 보내는 성부하나님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있고, 보내심을 받으시는 성자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 상호내재되어 있으며, 파송되는 성령에게도 동시존재, 상호내재가 된다면, 삼위일체는 구위삼체가 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또다른 보혜사인 성령, 그를 보내신다고 하셨을까?

성경은 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한분 예수라고 말하고 있을까?

예수님은 왜 자기 자신인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을까? 삼위일체가 인격적으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위로부터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왔을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에 예수가 아버지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으며(행7:55), 다윗은 시편110:1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내 주’를 구별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은 마22:43, 눅20:43-44. 행2:34-35에서 시편110:1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재성을 직접 말씀하셨다.

 

지방교회는 어거스틴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어거스틴과 동일한 주장을 한다는 것을 앞으로 세워서 어거스틴의 등 뒤에 숨어서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속이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무엇일까? 고전적 삼위일체에서 “상호내재”는 ‘페리코레시스’라고 하는데, 그 문자적인 뜻은 윤무(輪舞)를 말한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다”는 요한복음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이 상호내재라는 주장은 초대교회에서 종속론(오리겐)이 등장하였을 때에 그것을 반박하기 위한 주장으로서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에 의하여 주장된 것이다. 즉 초대교회에서 고전적인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잘못된 주장이 등장하였는데, 즉 성부가 가장 크고, 성자예수와 성령은 좀 열등한 신성을 가졌다는 소위 ‘종속론’이라는 주장이 오리겐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과 같이 예수는 열등한 신적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다”는 요한복음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소위 상호내재라는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그 상호내재는 서로가 동등하다는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주므로서 종속론에 멋진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호내재라는 이론은 종속론을 반격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삼위의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비판을 받게 된다.

 

-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상호내재)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IVP, 186-187쪽)

 

- 우리는 위격들의 상호내재성, 즉 후에 이른바, 페리코레시스(교류, 상호순환)라고 불리우는 교리를 발견한다. 신성은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세 위격들 속에는 '본성의 동일성'이 있다. 성자는 성부 안에 있고, 성부는 성자 안에 있다. 위격들의 구별에 따라서는 둘이 별개이나, 본질의 공유에 따라서는 하나이다. 위엄은 둘로 쪼개지지 않고, 영광도 나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 의해 설명되는 영광송 역시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형상에 따른 영광은 원형에로 나아간다. 한 경우에는 모방의 이유인 형상이고, 다른 경우에는 본질에 의한 아들이시다. 그러니까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를 갖는다. 그리고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 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그러나 각 위격은 한 동일실체를 전부를 갖되,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을 갖는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바실 교부의 견해, 150쪽)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은 종속설을 반격하기 위한 용어였다. 또 상호내재는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개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에서는 동적인 개념으로서 ‘상호침투, 상호순환’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게 된다. 정통신학은 인격이 구별되며, 상호교류가 가능한 상호내재의 개념을 안전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고전적 삼위일체를 슬쩍 끄집어 내어,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닌 것처럼 조작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교회사적인 배경은 언급하지 않고 감추면서 단지 초대교회 교부들과 어거스틴도 이런 주장을 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는 교회사적인 조작을 하는 것이다.

 

➂ 용어적인 문제점

  

양태론자들은 자신을 양태론이 아니라고 감추고 위장한다. 그 이유는 양태론이 기독교 2000년 교회사에서 단 한번도 정통신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태론자들이 가장 변명을 하는 단골 메뉴가 바로 “자신들은 어거스틴과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고전적 삼위일체는 현재의 삼위일체와 다르며, 삼위일체가 정립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항상 이단적인 주장이 먼저 등장하고, 그것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정통신학이 정립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전적 삼위일체는 정통신학이 정립되어가는 한 과정이었다.

  

히브리서 1:3에서 ‘휘포스타시스’(confidence essence, nature, person)라는 단어가 나타나는데 이 단어의 뜻은 “본질, 본체, 실체, 실상”이라는 뜻을 갖는데 이 단어가 삼위일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휘포스타시스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본질을 의미하였는데, 나중에 예수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이며 성령도 하나의 휘포스타시스가 되므로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거스틴이 이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단어가 “가면‘이라는 뜻도 갖고 있었다. 즉 연극에서 배우가 가면을 바꿔 쓰고 일인다역을 하는 개념으로서, 양태론의 의미가 풍기는 그러한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어거스틴이 양태론자였다는 내용이 아니라, 어거스틴이 번역한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결국 칼케톤 회의에서는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를 동의어라고 선언하게 되므로서, 양태론적인 오해를 종식시킨다.  

  

-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IVP, 198쪽)

 

즉 어거스틴과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자신들과 같은 삼위일체를 가졌다고 변명하는 양태론자들이 있다면, 스스로 양태론자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필자 주, 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위트니스 리는 정통 삼위일체가 형성되어진 용어의 과정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는 정통삼위일체를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헬라인 친구들은 한 본질과 세 실체라고 말했으나, 라틴인들은 한 본질(혹은 실체)과 세 인격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이 신비스로운 것으로만 이해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충분하겠다...... 세 인격이라고 말한다면, 왜 세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 각각을 유일한 한 인격이라 부를지언정, 세 인격이라고 부를 수 없다.(위트니스리 리, 성령, 51쪽)

 

필자와 [교회와 신앙]에서 공식토론을 한 지방교회 교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어거스틴을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 신학을 향한 충고, '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하면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Modalismus)을 운운하며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성급하고 극단적인 편견은 버려야 한다. 만약 이러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이유는 신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삼위일체가 자신들의 주장만으로 또 다시 악용되거나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만 한다.' (지방교회와의 토론 글 3편에서)

 

➃ 경륜적삼위일체

 

지방교회는 또 자신들은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 그들은 초대교회 교부들도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들은 자신들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본질적 삼위일체는 결국 상호내재이며, 그들이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곧 사역적 양태론을 뜻한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그들이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곧 양태론을 의미하는 사역적인 삼위일체이며, 그들이 말하는 본질적 삼위일체는 위장된 상호내재인 것이다.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이들이 말하는 용어의 뜻을 파악하면 이들의 주장은 전혀 어렵지 않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인 분류일 뿐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단지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즉 그들이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으로만 구별되어진다는 것으로 양태론이라는 스스로의 고백과 같다. 동일한 한 하나님이 사역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으로서, 구약에서는 아버지로 사역하셨고, 신약에서는 예수로 사역하셨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이 곧 사역적(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에서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어떤 것인가?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이들이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단지 사역적으로 구별되는 삼위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이미 4세기 이후에 자취를 감춘 이론일 뿐이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경륜적과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위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이러한 유형의 경륜주의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성부에 대한 계시였으며, 성육신에서 승천에 이른 시기는 성자에 대한 시대였고, 오순절 이후부터의 시기는 성령에 대해 계시하는 시대라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IVP, 151쪽)

 

또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도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켜 비판을 받았던 주장으로서,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던 견해이다. 정통신학에서의 상호내재라는 개념은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동적인 개념을 포함하여야만 한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필자 주: 갑바도기아 교부)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필자 주:양태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그렇다면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적인 연합이란 무엇일까? 각각 독립된 인격을 구별하는 연합을 뜻한다.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 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 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정통신학에서 페리코레시스는 인격적인 구별을 전제로 한다.

양태론은 단순한 이단적인 신학적 이론이 아니다. 양태론을 주장하게 되면, 와이셔츠의 처음 단추를 잘못 맞춘 결과가 되어 나중 단추를 채울 수가 없다. 실제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는 곳도 있으며, 실제로 지방교회는 예수의 가시적(可視的)이며 신체적인 재림을 부정하며, 죽어서 가는 사후 천국의 장소적인 개념도 부정한다. 또 양태론에 의하면 성령이 곧 다시 오신 예수가 되며, 예수가 죽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양태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별도의 예수의 재림은 없게 된다. 또 양태론자들에게 구약의 하나님의 신, 성령과 오순절 이후의 성령은 다른 존재가 된다. 성령은 오순절 이후에 처음 등장한 하나님 자신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뢰아는 구약의 ‘하나님의 신’을 천사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하나님 자신이 직접 육신으로 와서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이 동일한 존재가 되므로 십자가 대속의 개념이 달라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은 죄에 대한 대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공급하기 위한 신인합일의 목적이 된다.

 

2) 기독론

 

정통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지 않으며, 인성과 신성이 변화되지 않은 채 하나의 인격으로 연합되었다고 가르친다. 어느 성경에서도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이 구별되거나 서로 대립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내용으로 볼 때에 예수는 참사람이었으며 참하나님이셨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두 인격과 두 품성을 가졌다는 성경적인 내용을 단 하나도 찾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그분이 우리와 동일한 참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태초부터 계신 참 하나님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사를 통하여 살펴 보면, 초대교회의 기독론에서 다음과 같은 이단적인 주장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주장 중에서 많은 이단적인 주장이 있었는데 간략하게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➀ 예수는 인간적인 예수와 신적인 그리스도의 결합이라는 일부 그노시스파

➁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한 형태로 나타나셨다는 사벨리우스파의 양태론

➂ 그리스도의 일부는 피조물, 일부는 창조주라고 하는 반신으로 만든 아리우스파

➃ 인간이 육체와 혼과 영의 세부분이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육체와 혼의 두부분이고, 그리스도의 신성이 영으로 들어온다는 아폴로내리스파의 견해

➄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여 양성을 주장한 네스토리우스파

 

우리는 이러한 이단적인 기독론에 대해서 벌콥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노시스(영지주의)와 아폴로내리우스, 그리고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이단들의 기독론을 혼합시킨 것이 바로 지방교회의 기독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지방교회는 삼위일체의 이단적인 양태론과 함께, 기독론에서 초대교회부터 존재해 왔던 그 이단적인 주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기독론에 의한 몇가지 중대 오류 - 인성의 실재성에 대한 부정

제 2세기의 그노시스파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을 부정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순화한 육체, 혹은 천적인 육체로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적인 예수와 신적인 그리스도를 구별하여, 신적인 그리스도는 임시로 인간예수와 결합하였다고 보았다. 제 4세기의 싸벨리우스파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루이스벌콥, 기독교신학개론, 197-198쪽)

 

루이스벌콥이 말한 “인간적 예수와 신적 그리스도의 구별”이 바로 아폴로내리우스의 주장이며, 우리는 기독론에서 특히 아폴로내리우스에 대해서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아폴로내리우스)는 사람이 신, 혼, 영의 3부로 구성되었다는 헬라철학의 3분설의 개념을 가지고 로고스가 죄의 좌소인 영의 자리를 취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체와 혼만을 가지셨고 영의 자리는 로고스가 채웠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축소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영이 없는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신복윤교수.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 102쪽)

 

아폴로내리우스는 예수를 인상과 신성으로 분리하였는데 그가 말한 신성은 ‘영’이었으며, 그가 말한 인성은 ‘혼+육’으로 분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신성, 예수의 영은 곧 성부하나님 자신의 양태론적인 개념으로 본 것이다. 즉 양태론적으로 볼 때에 성부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오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영’이 되고, 이것을 지방교회는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그들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달리 구별한다.

정통교회의 기독론은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인성과 신성이 변화하지 않은 채 하나의 품성으로 연합하였다고 가르친다. 즉 지방교회는 인간 예수를 혼과 육으로 분리시켰고,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성부하나님 자신을 영으로 분리시킨 것이다.

 

- 비록 그분의 인간의 부분(필자 주, 혼 + 육)이 죽었지만, 죽지 않는 그분의 신성한 부분(필자 주, 영)은 영원히 산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자신 안에 신성한 요소 곧 거룩의 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44-45쪽)

 

지방교회는 예수의 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고 신성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분리를 시키는 것이다.

  

- 그 분이 육체 안에 사셨을 때에 그분의 한 부분은 다만 사람, 곧 다윗의 씨였다. 그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부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인정됨을 통해서이다(같은 책 45쪽)

 

-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 이전에 그분은 그분의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 분의 성육신으로 그분은 인성 안으로 들어가셨고 그 분의 존재의 부분으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러나 그 분의 인성은 그분이 부활할 때까지는 아들화 되지않은,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지 않았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23쪽)

 

- (골1:15-18의 구절)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이심을 계시한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67쪽)

 

지방교회가 예수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하며 부분적으로만 선택하여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4)

  

그러나 이 문장은 바로 앞 문장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1:3)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육신으로 볼 때에는 다윗의 혈통이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육신(사륵스)과 성결의 영(프뉴마)은 대조되는 단어로서, 육체적으로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났고, 영으로 보면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과 같이 그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가, 부활 후에 바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인가? 결론적으로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신성은 일반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이셨고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라는 뜻), 영으로 보아도 부활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정되다"는 단어는 헬라어 "호리조"로서 "공표하다, 선언하다. 결정하다"는 해석이 보다 분명하다. 영어로는 "be declared"(NIV, KJV)와 "to define correctly" 의 뜻이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보아도 다윗의 혈통으로 구약의 예언을 이루었으며, 영적으로 보아도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셨다는 의미인 것이다.

 

3) 인간론

 

➀ 예수(장소적인 삼분법으로 분리) = 지방교회 교인(장소적인 삼분법으로 분리)

 

즉 지방교회의 교인들에게 양태론적인 영이 내주하면, 그들은 곧 예수와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혼과 육’(인성)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에게 양태론적인 ‘그 영’(신성), 즉 하나님의 실재가 들어오면 그들은 예수와 동일한 구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됨으로서 그들은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예수의 재림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과 재림이 아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기 위해서 지방교회는 사람도 장소적인 삼분법(영 + 혼, 육)으로 분리하고, 예수도 삼분법(영 + 혼, 육)으로 분리를 시킨 것이다. 이제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이해가 갈 것이라고 본다. 더 자세한 설명은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읽어보면 그들의 전모를 알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그 분의 인성에는 죄가 없으며 결코 이전에 타락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의 인간의 부분은 구속될 필요가 없었으며 다만 높여질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인성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한 부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부분이고, 다른 한 부분은 타락되고 부패한 부분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8쪽)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와 하나가 되실 수 있다. 우리는 그 분과 한 영이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당신 안에 담기 위한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45쪽)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 바로 그 때 그들은 안팍으로 - 생명과 본성과 기질과 몸의 형태에서 -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4쪽)

 

-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들은 누구인가? 자녀들과 아버지는 같은 종류가 아닌가? 요한복음3장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고 말한다.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모두 같은 종류, 육신의 종류이다. 6절은 또 말하기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한다. 이 두 영은 같은 종류이며 또한 같은 근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많은 하나님-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믿고 경배하며 따르는 우리의 주님, 또한 첫번째 하나님-사람이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사람의 생활, 40쪽)

 

- 우리는 과정을 거친 삼일하나님 안에 있다. 바로 그 분이 우리 모두로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 분의 맏아들과 똑같게 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결국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체현이 되게 하실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8쪽)

 

- 이 삼일하나님이 우리의 거듭난 후로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해 오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맏아들과 똑같이 될 때까지 그 역사를 계속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인 우리 모두는 거룩케 됨, 새롭게 됨, 변화, 형상을 본받음의 과정을 거쳐 우리의 온 존재의 영화롭게 됨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18쪽)

 

위트니스 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사람(God-Man)이라고 부르며, 예수는 그 God-man의 첫 샘플이었다는 것이다. 혼과 육(인성)을 가진 지방교회 교인들이 신성(영)을 갖게 되면, 그들이 바로 God-man 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단적인 양태론과 이단적인 기독론이 아니라면 그들과 같은 주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단적인 인간론이 결합되면, 그들의 신인합일론이 완성이 되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가증스럽게 정통교회에게 자신들의 교리가 복음주의였으며, 오해였다고 말하면서 재검토를 부탁하고 있으며, 한기총 회장에게 서신을 보내며,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었다, 더욱이 몇몇 기독교 인사들은 지방교회 세미나에서 축사를 해주고, 그들의 책을 광고를 해주며, 그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선전해주고 있었다.

 

➁ 지방교회의 영과 혼과 육에 대한 잘못된 삼분법

 

정통교단에서도 어느 교단은 이분법을, 어느 교단은 삼분법을 가르친다. 물론 필자는 어느 교단에서 가르치는 이분법이 옳은가 혹은 삼분법을 옳은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은 살아있는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각각 분리된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는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에 대한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 영과 육의 대결, 선과 악의 대결의 이원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한국교회에 소개된 것은 워치만 니로부터 우리에게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숱한 이단들(지방교회, 구원파, 베뢰아, 다락방등)이 나타났다.

심지어 정통교회에서도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살아서 분리되는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간주하여 아래와 같은 이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상당히 많으며, 또한 영성운동, 영성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영과 육이 분리될 수 있다는 이단적인 주장도 많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는 이단이지만, 워치만 니는 이단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방교회 인간론은 워치만 니로부터 나온 것이다, 또한 그들의 양태론인 ‘삼일론’이라는 용어 자체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들의 배타적인 교회론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왔으며, 특히 단체구원론도 워치만 니로부터 나왔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관계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들이 "마치 부자관계와 같았다"고 진술하며,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워치만 니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존다비와 앤드류 머레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워치만 니는 존다비의 극단적 세대주의와 앤드류 머레이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며, 특히 존다비의 그의 독단적인 성경해석 때문에 형제교회의 지도자들과 많은 분쟁을 일으켜 많은 지도자들이 형제교회를 떠났다고 전해진다. 지방교회의 인간론은 삼분법을 공간적인 장소적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예수와 사람을 동일한 존재로 보기 위한 이론 전개에서 지방교회의 중요한 교리가 된다. 사람의 안에서 사탄(욱체)과 하나님(영)의 이원론적인 대결이 있으며, 이것이 지방교회의 성화교리가 되어지며, 베뢰아의 귀신론이 영향을 받게 된다.

                  

- 죄는 사단의 체현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 이 두 체현들이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고, 사단의 체현인 죄는 우리 육신 안에 있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하나님, 73쪽)

 

- 우리는 우리 존재에 세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당신은 사단이 그의 거처를 당신의 몸, 즉 당신의 육체 속에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는 것을 아는가?(위트니스 리, 왕국, 218쪽)

 

- 사람의 세 부분, 니 형제님은 그의 그리스도인 생활 초기부터 사람에게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살전 5:23). 그는 혼은 사람의 인격이고 몸은 물질적인 세계를 접하기 위한 사람의 바깥 부분이며 영은 영적 세계를 접하기 위한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부분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 안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

 

정통신학에서는 인간은 살아 있을 때에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 봅니다.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치만 니로부터 시작된 인간론은 사람을 살아서 영과 혼과 육으로 분리시킨다. 문제는 인간의 영에는 양태론적인 하나님이 거하고, 인간의 육에는 사탄이 거하게 된다는 이원론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인간의 혼에는 인격이 거하는데, 그 인간의 혼을 빼앗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단이 싸운다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사단은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에 인격화된 죄로 거하고 있다. 오직 살아있는 인격만이 어느 곳에 거할 수가 있다. 우리의 물질적인 몸 안에 있는 그의 근거지로부터 사단은 우리 혼을 차지하고 우리 혼을 그의 절대적인 통제 아래 두고 싶어한다.(왕국, 216쪽)

                

- 사단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우리 몸으로부터 우리 혼에 대해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 이같이 사단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역사한다. 주님은 반대방향으로 즉 안에서부터 밖으로 역사하신다. 어느날 주님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요 축인 우리 영 안에 들어오셔서 그것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다.(위트니스 리, 왕국, 217쪽)

 

참고삼아 베뢰아의 주장도 동일한 이원론이다. 물론 베뢰아도 양태론을 주장하며 기독론에서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킨다. 

 

-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졌기에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있지만 육체는 하나님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김기동, 마귀론 하 154쪽)

 

- 귀신은 사람의 영혼 속에는 들어오지 못하지만 육체 안에는 들어올 수 있습니다.(김기동, 마귀론 하 63쪽)

 

- 육신은 끊임없이 귀신들의 공격과 도전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이 거룩함같이 우리의 육신도 거룩하면 이를 대항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 혼은 주님의 보혈로 거룩해지고 육체도 말씀을 순종함으로 거룩해지기에 우리에게는 귀신이 들어와 머물 수가 없습니다.(김기동, 마귀론 하 155쪽)

 

그렇다면 육은 죄를 짓거나 사탄의 거처이고 영은 죄가 없으며 하나님의 거처일까? 육도 죄를 짓지만 영도 죄를 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거룩함을 온전하게 이루어 육과 영(spirit)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인간은 육체나 영적으로 모두 죄를 지으며 더러워진 것이다. 물론 성욕, 식욕같은 욕망을 육체적인 욕망이라고 표현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고깃덩어리 육체만의 욕망이 아니며, 결국은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욕망이다. 마찬가지로 육체는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아래 본문은 영혼과 육체가 따로 따로 주를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시63:1)

 

예수의 생명이 우리 육체에 나타난다는 성경은 그들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뜻을 언급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1)

   

물론 성경에서 바울은 육체와 영을 구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육체’와 ‘영’은 인간의 육신적 부분과 영적 부분을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는 표현이다.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영을 좇는 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 ‘영’은 ‘성령 하나님을 좇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물론 정신적인 영혼과 반대되고 대조되는 부분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대조되는 경우로 사용된다. 특히 “육신에 죄가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 자체가 곧 성령을 거스리는 전인적인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 성경본문과 같다.

 

“육체(인간)의 소욕은 성령(하나님)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다시 말하여 ‘육신에 있다’는 말의 뜻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상징적이며 상태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며, ‘영에 있다’는 말은 ‘거듭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육신(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7-8)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고깃덩어리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외면하는 전인적인 인간 자체의 소욕을 말하는 것이 명백하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은 문자적으로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혼에 속한 사람’(헬, 푸쉬기코스)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영과 혼은 실제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지만, 의미상 혹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으며, 영은 인간성의 특수한 방면으로서 사람과 하나님을 결합케 하는 방편으로, 혼은 인간에 내재한 속사람의 세속적 행동과 관습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죄는 그 자리를 육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자아가 죄를 짓는 것이다.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인간은 영(영혼)이 배제된 육체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히: 레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마음(헬: 칼디아)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헬: 칼디아)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즉 (1) 이단적인 신론인 양태론 (2) 이단적인 아폴로내리우스의 기독론 (3)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시키는 삼분법적인 인간론과 이원론이 혼합되어 “하나님 = 예수 = 살려주는 영”의 공식을 만들어내고, 예수를 “신성(영) + 인성(육 + 혼)”으로 분리시킨 다음에, “예수그리스도 = 지방교회 교인 = God man"이라는 공식을 만들어서 신인합일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부활이며 천국이며 재림이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유일하고 참교회이며, 기독교는 사탄의 왕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오해이다” 혹은, 자신들이 “복음주의이다”라고 거짓 조작을 하는 자들이 바로 지방교회의 정체인 것이다.

 

6. 신인합일론 

  

1) 신화(신인합일론,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 : 부활, 거듭남, 재림과 동의어

 

지방교회는 자신들은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하는데, “자신들은 하나님과 동일한 신격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지방교회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격적인 위치가 된다고 가르친다고 비판한 적이 없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는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에서는 예수는 God-man의 첫 샘플이었으며, 지방교회 교인에게 그 영이 들어오면,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지방교회, 몰몬교, 신천지등이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것을 신인합일설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지방교회의 신인합일설은 사람과 하나님의 구별이 없는 "똑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2)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든지 "예수를 닮는다"는 견해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등의 주장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성경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통신학이 말하는 연합의 개념이 무엇일까? 이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지방교회가 신인합일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은 정통신학의 연합개념과 같다고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인 그루뎀은 연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어감에 있어 각자의 개성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되지는 못하며 그리스도에게로 흡수되거나 우리의 개성을 영원히 잃어 버리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자신으로 남아서(고전13:12)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요일3:2) 그의 얼굴을 대하며 그에게 경배를 드리고 이마에 이름을 가지고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성품에 있어서는 서로 정확하게 같으면서도 독립적인 위격으로 남아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도 다른 은사들과 기능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되어갈 것이다"(마10:39, 요10:3, 계2:17, 시37:4)(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63쪽)

  

3) 지방교회의 신일합일

 

지방교회의 신일합일의 방법은 그야말로 유치한 수준을 드러낸다.

 

- 우리가 또한 삼일적으로 아들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신 그 영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를 때 당신은 주님을 누린다.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 주님을 더 부를수록 당신은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시며 실제의 영이며 당신 안에 계신 그 영을 더 갖게 된다. 실제란 주로 삼일하나님의 신성한 성분 안에 있는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그 영이 하나님의 실제이다.(위트니스 리, 새 예루살렘, 396쪽)

 

- 생명주는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올 준비가 되셨다. 우리가 "오 주 예수여"라고 부를 때 그분은 즉시 우리의 영의 종착지에 도착하신다. 우리의 영은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이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28쪽)

 

우리는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해 설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 '오 주 예수'를 세 번만 말하도록 한다면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불신자가 해야 할 것은 입을 열고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믿을 의도가 없다 할 지라도 그들은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들에게 의도가 있든 없든, 그들이 창문을 여는 한 공기는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다. (Lee Stream magazine, 교회와 신앙에서 발췌)

 

- 교회가 그분의 이 한 영을 마시며 그 분과 한 영이 됨: 우리가 "오 예수여!"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을 마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순간순간 이 성령을 마셔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성령이 오신다. 우리가 부르는 것은 주님이지만 받는 것은 성령이다. 예수는 그 분의 이름이요, 성령은 그분의 인격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오게 된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이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성령이 온다.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9쪽)

 

-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생명을 분배하는 영이 되심은 그 분이 사람에게 오시는 마지막 단계이다. 이제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그 분을 믿는 것이다. 그 분을 믿는 길은 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분은 즉시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그 분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우리는 그 분 안에 들어 간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분을 그분의 노정의 종착지인 우리의 영 안에 모셔온다. (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28쪽)

 

그들은 "오 주여"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양태론의 마지막 단계인 생명의 영이며 부활의 영인 삼일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실재인 그 영이 그들에게 들어오고, 그렇게 하여 그들에게 들어온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 안에서 성숙하게 자라나면 그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소위 신일합일이라고 불리는 방법이 주문 외우듯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음에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고 하여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면 주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신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주장일 따름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은혜이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용어는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다. 부활, 천국, 거듭남, 구원등은 모두 기독교와 다르며, 그들이 말하는 용어는 결국 신인합일을 뜻한다.

 

-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새 창조 안의 부활한 나를 말한다. 이 부활한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활시키셨는가? 부활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신성을 우리의 인성과 연합시키셨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부활한 것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43쪽)

 

- 그와 같이 완결된 영을 살아날 때, 이것이 바로 완결된 영의 부활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부활은 어떤 능력이나 사물이 아니라 한분의 인격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분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더욱이 부활의 실제는 삼일하나님의 최종완결인 그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결론 -삼일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부활은 하나임-을 갖는다.

 

- 주님의 오심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는 아닐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부터 오실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이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이 여러분으로부터 오실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위트니스 리의 왕국, 329쪽)

 

-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심으셨고, 그분이 지금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서 성숙되고 계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익고 성숙할 때, 그것은 그분의 오심의 때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의 오심은 갑작스런 사건이 아닐 것이다.(왕국, 330쪽)

 

지방교회는 예수의 재림도 다르고, 예수의 부활도 다르며, 사후의 천국도 부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오직 신인합일이며, 지방교회로 들어오는 단체구원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그런 뜻이 아니며 오해라고 조작을 하고 있다.

 

죽으면 천당(국)간다는 말은 이교도의 가르침입니다. 사탄이 한 최대의 거짓말 중 하나는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하늘 어디엔가 있는 집) 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근거가 전혀 없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이교도적인 거짓 사상이 버젓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믿음 생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을 변질시킴으로 참된 성도들 생각 속에서 말끔히 씻겨져야 할 누룩인 것입니다.(지방교회 게시판의 글)

 

- 일반적으로 말해서 기독교는 사람들이 죽으면 주 예수를 믿는 한, 그들에게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그들이 일단 죽으면 그들은 천당에 갈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여러분이 왕국의 비밀을 안다면 여기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왕국, 315쪽)

 

-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체적인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의 나라요, 하나의 민족이요, 하나의 단체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32쪽)

  

한 단체를 얻고자 하신다. 삼일하나님 그 분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 안으로 역사하게 하시어 그들을 한 무리가 되게 하고, 단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이것을 매우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는 곧 성도 개인의 신령함이 아니라 온 교회들이 하나님께 얻은 바 되고 거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33쪽)

 

- 그러므로 천국의 실제와 외형은 교회와 함께 시작해서 교회와 함께 나아갔다. 천국의 실제와 외형은 교회와 함께 하며 교회에 달려 있다. 한편으로 천국의 실제가 교회 안에 감취어져 있고, 또 한편으로는 천국의 외형이 교회의 외양과 함께 한다. 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교회 시대를 끝내실 때 천국의 실제와 외형도 끝날 것이다. 그 때 주 예수님은 천국의 외형, 즉 소위 기독교계를 불태우실 것이다. 동시에 천국의 실제는 천국의 나타남이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 왕국, 667쪽)

 

지방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은 비록 기독교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개념 자체가 모두가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 기독교에 수많은 분파된 이단들을 양산한 곳이다. 그들이 이단이 아니라고 변호하고 옹호하여 주는 목사들이 있다는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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