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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위 목사 /미 남침례 뉴에덴교회) |
바른믿음 이창모목사께 드리는 반론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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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모 목사: 김천 제자들경배와찬양교회 담임) |
2016년 10월 21일(금)16:37:42 “부활복음 위한 선무당의 칼춤을 보면서... 어린아이 같은 어이없는 시비”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이창모목사께서 반론해 주셨다.
이창모목사의 신학적 변증은 정이철목사의 “부활을 몰라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만 믿으면 구원이 있다.” 즉 정이철목사의 주장의 표현의 본질적 의미인 “부활 이전에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주장이며, 필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의 성경적 근거를 요일 5:12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이 말은 “딸만 있는 자나 자녀가 없는 자나 아예 미혼인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말과 같다”라는 주장으로 반론했다.
이창모목사가 제시된 성경적 배경은 사도요한은 “무릇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는 말씀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5절) 라는 사도요한의 질문의 의도는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한편 '오신'에(요일 4:2)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는 완료 시제이다.
완료시제는 한국말이 없는 표현이라, 한국적인 문법을 가지신 분들은 이해하기 힘든 시제이다. 즉 과거에 어떤 시점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진 상태를 완료시제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Incarnation 성육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역사적 부활을 통해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창모목사가 필자의 주장에 반론을 제시한 구절은 역사적 부활사건 이전에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제시한 반론과는 설득력이 약한 구절임을 본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이 없이 십자가만을 통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으로 제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확신(믿음)할 수 있었을까? 본 절에 말씀하고 있는 핵심은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는 믿음의 관점으로 다가가야 하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부활사건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여기서 “인정되셨으니”란 뜻은,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 후에야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의 관점은 구원의 주체에 대한 믿음의 본질적 개념으로 정이철 목사에게 변론했는데, 이창모목사는 요일 5:12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이 말은 딸만 있는 자나 자녀가 없는 자나 아예 미혼인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말과 같다라는 주장은 납득하기 힘든 내용이며, 이창모목사는 전제론적 믿음에 근거한 십자가의 속죄론적 관점에서 반론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므로 필자가 반론한 내용의 대한 이해 부족으로 사료된다.
필자가 정이철목사의 주장을 반론하게 된 이유는 김성로목사의 설교의 의도를 왜곡 편집하여 주관적 체험에서 나온 교의신학을 바탕으로 자기 주관적, 감정적인 비설득적이고 왜곡된 주장이기에 반론을 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필자가 정이철목사에 이단적 사상은 구원과 믿음의 상관관계, 성령사역의 본질, 조직신학 인간론적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납득이 안 될 것이다.
이창모목사가 필자의 5개의 반박문을 정독하시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답변을 드리면 차후에 반론하도록 하겠다.
필자는 201610.17일 첫번째 공고문에서 토론의 Rule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필자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여 독자나 필자에게 정확히 이해하고 납득이 될만한 논리를 가지고 글을 써주길 바란다.
필자가 이(2) 년차 목사라는 것과 신학적 내공, 대책위원회 위원장 자격여부는 이창모목사께서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필자의 개인 신상파악을 조사하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그리고 이창모목사께서 어떤 산전수전을 겪은 신학의 고수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전혀 거기에 관심이 없다. 필자가 보낸 5가지 반박문에 대한 반론을 부탁한 것이다. 앞으로 필자에게 반론을 제기할 때는 개인적인 걱정과 감정의 글은 자제해 주시고, 신학적 토론을 중심으로 글을 써주시길 부탁한다. 즉 문제를 제기하고 필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에 대한 성경신학에 근거한 해석과 권위있는 학술적 근거를 가지고 결론을 제시하길 바란다.
이창모목사는 2016년 10월 21일(금), ‘부활복음’을 위한 선무당의 칼춤을 보면서... 어린아이 같은 어이없는 시비란에서 “이재위목사가 이제 겨우 2년차 목사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내공이 어린아이 수준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글에서 느낄수 있는 고수 같은 오만함을 염두에 둔다면 아마 이재위목사는 어린아이 같은 자신의 내공 수준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신학적인 토론에서 내공, 고수, 어린아이 수준이라는 단어들이 왜 나오는지 이해가 안되는 서론이다. 신학토론이 무술연마하는 것도 아니고, 납득이 잘 안되는 내용이다. 앞으로는 이창모목사께서는 객관적인 변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논박하길 바란다.
“먼저 산전수전 다 겪은 선배로서 한 마디 충고한다며 이재위목사는 아직은 정이철목사나 림헌원목사 같은 이를 비판할 군번이 아님을 깨닫고, 공부에 더욱 진력할 것을 부탁하고 싶다.”는 말을 한 이창모목사께서 어떤 산전수전을 겪은 목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힘든 삶을 사셨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산전수전 겪고 나이가 많다고 신학적 깊이가 탁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필자는 정이철목사, 림헌원목사의 인격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이철목사와 이창모목사, 림헌원목사(오직십자가)가 1년 동안 김성로목사에 대헤 “사악한 이단”이라고 단정하고 쓴 글을 분석하고 반론한 것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이창모목사의 반론을 읽으면서 필자의 개인적 견해는 이창모목사는 필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고착화된 편협적 신학의 틀을 가지고 주관적인 자신의 견해를 반론한 설득력 없는 논박임을 보게 된다.
특히 선배, 군번, 공부에 진력, 어린아이, 선무당, 칼춤, 내공, 고수, 어린아이 같은 어이 없는 시비등에 대한 단어와 문장들을 보면서 이창모목사께서 먼저 사용했던 비유처럼 생각나는 속담이 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
참고로 미남침례 목사들은 선후배 사이로 만나지 않는다. 같은 동역자로 존중해 주고 특히 자신보다 연하라도 개교회 담임목사에 대한 존경과 예우가 있다. 침례교 지방회를 가입했을 때, 한 목사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배목사가 말씀을 비 성경적으로 전하면 후배목사는 언제든지 이의를 제기 할 수 있고, 만약 후배목사의 말씀 해석이 성경적이면 그 자리에서 즉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침례교 목사의 정신이라고 권면해 주셨다.
즉 말씀 앞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이 성경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남침례교 목사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보고 있는 신학적인 토론장에서 목사가 ‘선무당의 칼춤을 보면서’라는 표현은 좀 아니지 않는가?
독자마당의 글들을 분석하면서 (2016년 03-30 01:04 승인) 부활에 이르지 못하는 무능한 십자가? 부활구원론, 하나님 은혜 부정하는 궤변이라는 독자 마당에 이창모목사께서 필자에게 댓글을 단 내용을 발견했다.
이창모목사의 댓글 (2016-04-03 04:02:36)
‘이재위님’께 ~ 바울 당시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이 부활을 전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부활을 전한 것은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창모목사의 주장은 사실 틀린 주장이 아니다. 바울이 전하고 싶었던 것은 이창모목사의 주장대로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이다. 그리고 필자가 자랑하는 것도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과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이다.
그런데 이창모목사의 신학의 편협적 시각은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변증론에 입장에서 본 십자가와 부활의 기능론적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전제적 교의신학을 바탕으로 부활을 십자가 이후에 당연히 따라오는 종말론적 신앙의 부활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변증학적인 관점에서 부활은 인간의 관점에서 최고의 증거라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자랑이다.
사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 예수의 죽으심이 대단한가 부활하심이 대단한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부활이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죽음이 더 대단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창시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부활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인간되어 죽으신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즉 왜냐하면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는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와 사랑의 결정체임을 믿는다.
왜 부활이 중요한가
자랑을 하려면 반드시 증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애틀랜타 조지아 주에 땅을 내가 다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믿어줄 것인가? 그런데 조지아 주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 문서와 많은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주지사가 증인이 되어 준다면 어느 정도는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돈이 많다고 자랑할 필요가 없다. 즉 조지아 땅에 내 땅이라고 주장하고 공증된 땅 문서와 공인된 증인이 있으면 부자라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부자로 나를 인정해 주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직접 말씀 한 적 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요 10:30/33)
또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치료하면서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막 2:5) 왜냐하면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와 중풍병자에게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둘 다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자신이 심판주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말이며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고치는 사건을 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존재(심판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이 증거되어야 하며 그 피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할 전능자의 피(성자 예수)의 피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한 것이다. 확실한 증거를 이야기 하면 본질은 강조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증거의 크기에 따라 믿음도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행전 20:28)
그래서 사도들이 선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었으며 사도들이 주장하는 증거(사건)가 진실이라는 가장 객관적이며 공적인 증거는 자신들의 하나 뿐인 생명이었다. 거짓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거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달려갈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전 20:24)
결론
십자가에 흘린 피가 전능자의 피라는 것을 자랑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역사적 부활사건이며, 사도들이 생명걸고 부활을 증거한 이유이며 춘천 한마음교회와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정이철목사께서 주장하시는 “성령을 통해 십자가를 믿으면 부활은 따라오는 것이다.” 라는 주장은 변증학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믿음을 관념화, 전제주의적 믿음으로 전략시키는 발상이다. 기독교의 믿음은 독보적 증거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인간의 지정의를 가지고 믿을 수 있는 것이며 성령의 사역은 신자를 말씀으로 인도하여 객관적 믿음의 증거들을(성경대로) 통해 확증된 인격적 믿음 안에 내주하여 성령을 통해 예수를 주로 시인케 하는 것입니다. (고전 12:3) 이 것을 인격적인 주님과의 만남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즉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인임에 틀림 없지만, 인간이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완전한 피를 믿게 하는 최고의 증거가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 나신 부활 사건인 것이다.(변증학적 관점)
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
재커라이어스의 박사의 견해는 부활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예수의 신성에 반대되는 주장을 펴고 있는 다른 모든 종교체계는 진리일 수 없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설득력이 강하다. 인간의 운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부활은 그 분의 신성을 확증한 사건이자,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천국 문을 열어준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속죄사역을 이루셨지만 인간의 구원은 반드시 놋뱀(십자가)을 쳐다 봐야 한다. 그러데 바라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의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주(Lord)로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으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이창모목사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든 민족 인종들이 믿을 수 있는 객관적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생명걸고 전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목사님이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춘천한마음교회가 그들의 삶과 고백으로 증거되고 있는 믿음의 열매들을 보시길 바랍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 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빚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행전 26:22-23)
그리고 이단성이 있다는 말과 사악한 이단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정이철목사, 이창모목사의 주장들이 왜곡 편집된 주장들이라면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창모목사의 주장들을 검토하면서 이창모목사님의 일부 주장 중에 성경신학적관점에서 성경해석에 오류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차후에 5개의 반박문에 대한 반론을 마치면 반론하도록 하겠다.
혹시 변론 중에 이창모목사께 무례함이 있었다면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 글에 대한 반론이 있다면 필자가 3주전 부터 보낸 5개의 반박문부터 먼저 재 반론 하시길 부탁 드립니다.
Oct.10.27
이재위 목사 드림 / 미 남침례 대책위